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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캄보디아 프로 축구 발전에 한국인이 있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며칠 전 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중 앞에 가는 화려하고 멋진 버스를 발견하였다. 캄보디아 도로에서 보게 되는 대부분의 버스는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 버스이기에 대개는 눈에 익은 한국의 디자인인데 이 버스는 한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함과 역동적인 모습으로 단장하여 나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잠깐 사이에 사라진 이 버스는 캄보디아 프로 축구단 중 하나인 ‘앙코르 FC’팀의 버스였다. 차량의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연식이 아닌 비교적 새 차에 가까운 상태로 보아 구단 사정이 괜찮은가보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축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많은 지인들은 ‘캄보디아에 프로 축구단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최빈국에서 개도국으로 진입하려는 정도의 경제 규모인 캄보디아에 무슨 프로 축구단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캄보디아는 16년의 역사를 가진 프로 축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 동남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축구 사랑은 한국의 ‘K 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나 ‘독일 분데스리가’, ‘스페인 프리메라 리그’ 등 내 놓으라하는 유명 리그의 팬들만은 못해도 그에 못지않은 축구 사랑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베트남이 그렇고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나라들이 모두 비슷한 경우이다. 특히 베트남의 광적인 축구 열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잖아도 축구에 대한 열기가 대단한데 박항서 감독 부임 이후 비약적인 축구 발전을 이룬 베트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축구 사랑이 있는 나라이다. 베트남은 A매치 빅게임이라도 열리는 날에는 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많은 국민들이 TV 앞에 모여 있을 정도이고 일손을 놓은 택시 기사들 때문에 택시 잡기가 힘들 때도 있다. 태국 역시 베트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나라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캄보디아도 축구 열풍이 불게 되었나보다. 캄보디아에는 의외로 13개의 꽤 많은 프로 축구단이 있다. 경제 규모로 보아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규모이다. 1982년부터 리그가 시작되었으니 역사도 16년이나 됐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리그는 성적에 따라 상위 리그로 승급할 수 있고 반면에 하위 리그로 강등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니 구색도 제법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소년 축구 유망주를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캄보디아 프로 축구 리그는 2월부터 10월까지 주말에 경기가 열린다. 각 팀별로 총 24번의 경기를 치러서 리그 우승자를 가린다. 특이한 것은 정규 리그전 외에도 외국 용병들을 제외한 순수 캄보디아 선수들만 참가하는 ‘훈센 수상 컵’ 대회가 따로 열린다. 외국 용병들만 못한 기량을 가진 자국 선수들을 배려한 그들만의 잔치를 한 번 더 여는 셈이다. 그리고 구단 중에는 한국인 감독과 한국인 선수도 있다. 그밖에 외국 용병 선수들도 제법 있는데 특이한 것은 북한 선수들도 외화 벌이를 위해서 뛰었던 때가 있었다.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경기장에서 활약했던 모습은 캄보디아 리그 아니면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용병 선수들 중에는 주로 아프리카 출신이 많은데 그 이유가 후하게 지급할 수 없는 구단의 재정 여력 때문이지 않나 생각된다. 지난 2018년에는 한국 선수들이 무려 10명이나 리그에서 활약했는데 지금은 한국 선수 대부분이 팀을 떠났다. 아마도 경기 중 입은 부상이나 코로나 영향, 아니면 연봉이 충분치 않은 이유 때문일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국 선수들이 활약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구단도 있다. 1부 리그팀 ‘스와이 리엥 FC’팀은 한국계 은행 ‘KB Bank’에서 후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나 교민 기업에서도 많은 한국 선수들이 캄보디아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있으며 크고 작은 후원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캄보디아 1부 리그 명문 ‘티피 아미 FC’구단에서는 한국인 이태훈 감독을 영입하였고 나아가 축구 유망주 ‘하찬영’ 선수를 스카웃하여 구단 전력을 강화시켰다. 사실 이태훈 감독은 캄보디아 축구계에서 대단히 유명한 한국인이다. 그는 이미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캄보디아 국가대표 팀 사령탑을 맡았다가 잠시 팀을 떠난 후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다시 대표 팀 감독으로 복귀하였는데 재임 중이던 2014년에는 월드컵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전에서 라오스를 이겼고 그 뒤 마카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지역 2차 예선에 캄보디아 국가 대표 팀을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 유명한 축구 지도자이다. 캄보디아에서 이태훈 감독은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만큼 유명한 축구 지도자이다. 그런 그가 캄보디아 프로 축구 1부 리그 명문 팀 ‘티피 아미 FC’ 사령탑으로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캄보디아 프로 축구 발전과 인기 몰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서 경기 수도 줄었고 그나마 50명 이내의 관중이거나 아니면 아예 무관중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태반이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캄보디아 프로 축구리그에서 훌륭한 한국인 지도자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여 축구를 통한 민간 외교에서 또 다른 국격을 과시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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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개인적으로 고단한 일(3개월간 직접 녹음실을 공사하는 중입니다.)을 진행하다보니 글을 쓸 여력이 되지 못해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한 달 넘게 기고를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필자가 가입한 단체가 있다. ‘예술인 연대’라는 곳으로 ‘예술인 당사자주의’를 표방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부의 예술 정책과 관련된 사업, 사안들을 예술인이 관리, 실행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고 주창하는 모임이다. 최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https://artistsolidarity.modoo.at/ 여러 전문단체 들이 있다. 학교부터 병원, 검찰, 법원 등등 모두 전문적이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수장을 맡는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학교의 수장은 교사가 교장이라는 자리를 맡아서 책임을 진다. 병원의 가장 높은 자리인 병원장 또한 의사가 맡는다. 검찰의 수장인 총장 또한 검사가 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이렇게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예술단체, 기관들의 수장은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 바로 검색해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의 수장은 현재 회계법인 대표가 맡고 있다. 올해 초까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던 서울문화재단의 대표는 전대표가 현재 직무정지되는 사태를 겪고 나서 서울시 문화본부장(공무원)이 직무대행을 하고 있다. 각 지역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회관, 문화재단들 역시 이와 별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예술인 연대에서 주창하는 ‘당사자주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예술인들이 단체와 기관을 운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친 정부인사의 보은 인사로 앉게 되는 문화단체장의 자리를 예술인들에게 돌려달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예술인은 직업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취미, 아마추어가 아닌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예술가의 일자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단체, 기관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현재 상황을 연구한 논문이 예술인 연대의 자료로 올라와 있다. 예술인들이 미취업 대상자로 인식되는 사회 (현재 국내 대학 교육에서 대부분의 예술 전공자들은 4대보험이 적용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미취업 상태로 인식이 되며 집계되고 있고 이런 현상은 대학 평가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하기 때문에 입학 경쟁률은 가장 높게 나오지만 대학 평가에서는 언제나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런 고질적ㆍ구조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에 대한 응답을 보고 싶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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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정보미공개 불복절차[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각종의 항고쟁송을 진행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어 때로는 힘든 쟁송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또는 유사한 공공기관일 경우에는 본인은 정보가 상당하게 부족한데도 상대방의 경우는 수십년 간에 축척된 데이터를 통해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였던 자료를 소송이나 심판 중에 제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소이 '정보화 시대'라고 하여 많은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확보할 수 있지만, 인터넷으로 확보 못하는 정보 또한 상당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아실 겁니다. 이에 지난번 칼럼에서 정보공개에 대한 필요성을 논하였다면 오늘은 정보공개청구에도 불구하고 미공개로 확보 못하는 정보미공개에 따른 불복절차를 설명드리겠습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또는 이와 유사한 공공기관일 경우에는 공개청된 정보에 대한 공개여부를 결정한 때에는 공개일시, 공개장소 등을 명시하여 청구인에게 통지를 해야 함이 의무이며, 공개를 결정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제3자의 비공개요청에 불구하고 공개결정한 때는 제외)의 범위 내에서 공개일시를 정하게 되며, 청구인이 요청한 때에는 공개일시를 달리 정할 수 있습니다. 단, 청구인이 공개일시로부터 10일이 경과할 때까지 정당한 사유없이 그 정보의 공개에 응하지 아니한 때에는 이를 내부적으로 종결처리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우 청구인에게 가장하여 정보공개 통지를 한 것처럼 하여 이를 청구인 모르게 종결처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행정절차상 현재에는 불가능함에 따라 거의 이런 경우는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공개를 하지 않는 비공개결정 통지는 그 사실을 청구인에게 지체없이 문서로 통지하여야 하며, 여기서 구두, 문자로 통보시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반드시 문서로 통지를 받은 경우 비공개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공개청에서 확보 할 수 있으니, 추후 비공개 결정을 문자로만 통보받은 경우에는 정보공개에 대한 지연으로 담당 공개청을 고소 및 진정할 수 있으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적으로 공개대상이 되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비공개결정의 사유로 앞선 칼럼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 다른법률 등에서 비공개 사유로 정한 경우, 2. 국방통일외교 등에 이익저하, 3.국민 생명 재산 보호에 지장, 4.진행중인 재판에 영향, 5.연구개발에 지장, 6.지극히 개인적 정보, 7.기타 사유 등의 7가지에 해당되는 경우 비공개 결정을 하지만, 실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 정보에 해당되어 비공개를 하려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여러가지 사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국민이 정보공개를 요청하는데 합당한 비공개결정 사유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 정보에 해당되어 공개해줄 수 없다는 경우가 대부분의 사유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공개결정 사유에 대해 면밀한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웃집에서 건축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건축공사로 인해 피해가 발생중이라면 이웃집에서 허가를 받은 사항이 적법한지 불법인지를 먼저 판단하셔야 할 것인데, 이와 관련된 정보공개를 관할관청에 요청한 경우 해당 관할관청은 앞서 말씀드린 지극히 개인적 정보 사유로 공개해 줄 수 없다고 할 것임이 분명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건축법의 경우는 관할관청에서 건축허가와 관련된 경우 이해관계인에게 피해가 가는지 안가는지도 허가시 검토해야할 사항으로 건축법에 명시되어 있어 개인정보 중 민감정보를 제외한 공적조서상의 공개된 개인정보를 기준으로 하여 공개할 수 있음을 불복절차 중 따져야 하며,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를 허가관청이 유지하는 경우는 행정심판법에 따라 행정심판을 통하여 공개여부를 재결받아 정보를 획득할 수 있으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개념이 시대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현재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정된 법률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입니다. 이 법률은 재정 초기부터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되었지만, 현재에는 어느정도 정착으로 인해 활성화가 된 법률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법률을 충분히 활용하여 고충 및 의문이 발생되던 부분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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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 정약전⑥ 손암을 만나기 위해 흑산도에 간 다산의 둘째 아들[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2020년 9월에 반가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한문학회 79집’을 통해 정민 교수(한양대학교)가 학계에 최초로 전문을 공개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다. 이 글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기행문과 기행시에 대한 논문이다. 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 ‘시명다식(詩名多識)’ 등을 지었다. '부해기'는 학유가 24살 때에 아버지 다산의 뜻을 받들어 흑산도에 유배 중인 중부(仲父 둘째 큰아버지) 손암 정약전을 뵙고 돌아온 51일(1809년 2월 3일~3월 24일)간의 기행일기다. 이 일기에는 조선후기 흑산도 주민들의 생활모습과 지명이나 풍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특히 손암의 적거지 이동과 불분명했던 연대기에 관련된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이 자료는 손암 정약전 연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을 출발해 영암에서 배에 올라 고초 끝에 흑산도에서 중부와 눈물의 상봉을 한 후, 공부를 점검 받으며 여러 지역을 유람하고 3월 1일에는 소사미(小沙尾) 마을 냇가 바위 위에서 술과 안주에 꽃지짐을 마련한 손암의 생신 잔치를 했다는 얘기 등 많은 부분들이 학술자료의 소중함을 넘어 놀랍고, 안타깝고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그동안 학유의 흑산도 기행 내용은 다산과 손암이 쓴 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유배기간 중에 손암이 조카와 조우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정 민 교수는 이것을 국가의 죄를 입은 죄수 간에 중간에 자식을 두어 왕래 했다는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고 보았다. 손암은 유배 전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잃고 하나 남은 아들 학초(學樵)가 있었다. 학유가 흑산도로 가기 전인 1806년경에 다산이 강진에서 형님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초가 지난 경신년 겨울에 독서하는 걸 보니 이미 그애가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지난 해에 큰애(다산의 장남 학연)의 말을 들으니 앞서의 견해에 더욱 믿음이 섭니다. 올봄에 그애가 물어온 몇가지 조목을 보고서 놀라고 놀랐습니다. (중략) 제 생각으로는 금년 가을에 이곳 강진으로 데려와서 겨울 동안 가르치고 내년 봄에는 형님 곁으로 들어가서 모시고 있다가 4월이나 5월 사이에 돌아간다면 그애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잘 개발되고 방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아이 학유도 함께 와서 공부하고 가게 하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해렴 역) 학초의 독서를 보니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고 믿음이 간다. 가을에 학유와 학초를 강진으로 불러 가르쳐서 내년 봄에 흑산도로 보내 몇 달 형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다고 다산은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글을 받은 손암은 이렇게 답장했다. -이와 같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기뻐서 잠이 오질 않네. 올 가을 데려오는 논의는 내가 권하지도 막지도 않으려네. 다만 모자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용기를 내더라도 여러 의논들이 많이들 말려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못할 걸세. 만약 남쪽으로 온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정 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이 말에 따라 학유와 함께 강진으로 내려올 준비를 하던 학초가 짐을 싸던 중 홀연 병을 얻어 세상을 뜨자 아들의 남행을 기다리던 손암은 절망에 빠졌다. 결국 1808년 4월에 학유 혼자 강진으로 내려왔고, 해를 넘긴 1809년 봄에 다산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학초를 대신해서 중부가 계신 흑산도로 찾아가 뵐 것을 부탁했던 듯하다”고 밝혔다. 학유는 '부해기'에서 2월 3일에 흑산도 방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 원년 신유년(1801) 겨울 가경 6년에 중부(仲父)이신 손암 선생께서 흑산도로 귀양 가셨다. 섬은 나주 바다 가운데 있으니 큰 바다를 천 리나 건너야 한다. 바람과 파도가 몹시 거세서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이라도 감히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였다. 정묘년(1807) 봄에 학초(學樵)가 조운선을 타려고 행장을 이미 갖추었으나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중부께서는 기다리시다가 달을 넘기고서야 궂은 소식을 들었다. 궁하고 외로운 처지를 슬퍼하다가 도리어 병이 되어 해를 넘기도록 앓아누워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무진년(1808) 봄에 내가 강진에 가서 거칠게 아버님을 봉양하였다. 아버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더니 울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뭍에서 살아 주위 환경과 서책이 완연한 인간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저 구름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 형편이 어떠하겠느냐. 네가 한 번 가서 뵙도록 해라’” 학초는 매우 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다산이 쓴 '형자학초묘지명(兄子學樵墓誌銘 형님의 아들 학초의 묘지명)에 씌어 있는 학초에 대한 글이다. -학초는 형님 손암선생의 아들이다. 손암선생은 여러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신유년(순조1년)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선생은 신지도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형님은 흑산도로 정배되고 나는 강진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떠나게 되었다. 학초는 길게 땋은 머리로 화성의 남쪽 유천의 점사(작은점포)에서 우리를 전송하였는데 그 때 나이 11세였다. 집에 번국(중국)에서 가져온 사안주(구렁이눈) 1개가 있었는데 곧 큰 구렁이의 눈동자였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 독사 따위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이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마른 나무가 되어 버리니 기이한 보배였다. 학초가 울며 이 보배를 바치면서 "흑산도는 초목이 무성하여 무서운 뱀들이 많은 곳입니다. 이 구슬로 스스로를 보호하소서." 하니, 손암선생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 한편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서로 헤어졌다. 내가 유배온 이래로 저술한 육경과 사서에 관한 학설 2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학초는 신해년(정조15년)에 태어나서 정묘년(순조7년) 가을 7월 19일에 죽으니 그 수가 겨우 17세이다.- 손암은 여러 아들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잃고 늦게나마 얻게 된 아들을 몹시 사랑했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240권의 새로운 학설을 학초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과, 학초에 대해 기술한 것들을 볼 때 그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도 보통의 학문이 아니었다. 큰 아들 학유는 초의선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문필을 드높이면서 다산의 유배 다음해부터 아버지의 유배가 억울하다는 상소를 정약용이 해배 될 때까지 끊임없이 올린 인물이다. 둘째 아들 학유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인문학자로 분류될 정도로 많은 문헌을 남기고 있다. 두 아들 모두 유배 중인 아버지의 학문을 도왔던 뛰어난 학자들이었는데 이러한 두 아들이 있음에도 다산은 형님 손암의 아들 학초에게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전수코자 했을 정도로 학초는 총명했다. 손암이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학초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의 집에는 중국에서 들여 온 큰 구렁이의 눈으로 만든 사안주라고 하는 구슬이 있었고 그 구슬이 뱀을 쫓는 대단한 효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안주 구슬을 어린 학초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아버지께 유배지에 뱀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하며 눈물로 손에 쥐어 드리는 어린 학초의 애처로운 모습, 그 어린 학초와 아버지의 그 눈물겨운 생이별의 모습을 다산이 학초의 묘지명에 기록하였다. 이렇게 애절한 이별을 나눈 아들이 7년 후에 장가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약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추측을 할 뿐 전해지는 바는 없었다. 이제 새로 공개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를 통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앞으로 흑산도와 손암 정약전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을 기대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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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외도에서 바뀐 인생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여름이다. 코로나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날들이지만 올 여름에 꼭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내가 군대생활을 했던 남해바다 작은 섬 외도다. 그곳에 가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버린 강수일씨다. 거제도와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 무인도 외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보고싶은 여행지 부동의 1위로 만든 첫 시작은 강수일씨였다. 외도에서 강수일씨를 보며 보낸 1년의 군대 생활이 나를 나무에 눈뜨게 하였고 이후 내 삶의 항로를 결정지었다. 나는 육군으로 입대하여 상병 달고 하사교육을 받아 하사로 전역하였다. 거제도에서 군복무를 하던 나는 누구 앞에서든지 떨지 않고 발표를 잘한 덕분에 특별한 부대배치를 받게 되었다. 거제도에서 중대장을 하다가 장승포에서 10여분 거리 바다 4km 덜어진 섬 외도로 갔다.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않는 무인도 외로운 섬이었다. 하지만 외도에 자생하는 애기동백들은 겨울이면 바닷바람에 볼이 발갛게 어여쁜 꽃망울을 터트렸고 난대성 상록수가 우거져 아름다웠다. 귤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빙둘러 심은 향나무는 제멋대로 자라 무성했다. 외도는 5만평 작은 섬이지만 풍광이 수려해서 사단의 고위급 외부손님 방문이 많았다. 그때마다 브리핑을 해야했는데 브리핑을 잘하는 내가 배치된 것이다. 브리핑 특화 해안 분대장이었다. 섬의 구석구석을 사랑바위 진주 해안등 모습과 느낌을 실감나게 스토리텔링하여 소개하고 안내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외도는 지금 같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내가 배치되기 몇 년 전 외도는 6가구 섬주민이 농사를 짓는 작은섬이었고 운동장이 마당만한 초등학교는 학생이 세 명 있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고등학교는 바다 건너 거제도 장승촌에서 다녀야했다. 그런데 외도에 하나뿐인 초등학교가 폐교되자 주민들 모두가 거제도 장승촌으로 이사를 가고 외도는 개인에게 매매되었다. 새 주인은 서울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거제도 앞바다로 바다낚시를 왔다가 풍랑을 피해 가까운 섬으로 배를 댄 곳이 외도였다. 하룻밤 민박은 사람의 운명과 섬의 운명을 바꾸었다. 북에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웠던 그분은 고향과 흡사한 섬의 모습을 잊지 못하다가 몇 년 후 섬을 통째로 사서 내려왔던 것이다. 동대문 부부는 초가집에 살면서 학교마당에 돼지를 길렀는데 사료값이 비싸지고 수지가 맞지않았다. 돼지를 포기하고 고구마를 심던 밭에 3천그루의 귤나무를 심었다. 그렇지만 태풍이 불면 바람을 맞아 귤이 다 떨어졌다. 바람을 막아볼 요량으로 편백나무 8천 그루를 심었으나 추운 날씨로 인해 얼어죽었다. 배를 대는 선착장은 일곱차례나 파도에 쓸려갔다. 큰 손해를 본 부부는 서울로 다시 떠나며 섬사람 강수일씨에게 섬의 관리를 부탁했다. 강수일씨 부부는 딸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고향 외도로 출ㆍ퇴근했다. 강수일씨가 외도를 관리하면서 섬은 놀랍게 변해갔다. 어느 날부터 강수일씨는 영화 가위손의 조니뎁처럼 향나무를 하나 하나 다른 모양으로 아름답게 가다듬어갔다. 여인의 모습 사슴이나 용의 모양으로 향나무 하나 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 모습에 감탄했다. 신이 내린 예술가였다. 가끔 우리 부대원들이 배로 큰 나무를 옮기거나 깊은 구덩이를 파야하는 삽질같은 힘든 일을 도와주면 용돈을 주었는데 우리 부대원들은 그 돈으로 거제도에서 맛있는 것을 사다가 먹어서 좋았다. 강수일씨는 구석구석 꼭 필요한 나무도 심었다. 비싼 나무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섬에서 자라는 나무 그대로를 전지를 해서 섬을 차츰차츰 이국적인 유럽풍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내게 감탄과 깨달음을 주었다. 창조가 기적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외도는 5만평 작은 섬이지만 우리집은 뒷산만해도 10만평이 넘는 산이 있다. 정읍은 빙둘러 칠보산, 내장산, 두승산, 초산이 있다. 옥정호 내장호 큰 호수도 두 개다. 그 산들과 나무가 얼마나 대단한 밑천인지 나는 생각했다. 산으로 둘러쌓인 고향을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 산이 있는 고향에 살기로 결심하고 나는 제대를 했다. 큰 호수가 두 개 초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정읍을 아름다운 도심정원으로 만드는 상상을 산꼭대기 초소에서 종종 생각했다. 인생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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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새로운 물결의 시작: 창의적 아이디어와 현실의 부정[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무심한 시선, 그 너머의 감각 지난 5월부터 제주시 원도심 이아갤러리에서는 문창배 작가의 '무심한 시선, 그 너머의 감각' 개인전이 3개월간 진행되었다. 문창배 작가는 ‘몽돌’과 ‘파도’ 시리즈를 통해 꾸준하게 이름을 알려오고 있는 제주를 대표하는 극실주의 회화 작가이다. 이번 전시회는 예리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흑백의 대조를 극명하게 처리하고 전통적인 붓 대신 날카로운 의료용 매스를 사용해 캔버스의 표면을 예리하게 긁어내는 작업 방식을 취했다. 필자와의 만남에서는 작품 작업에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기에 극도의 긴장감의 연속이라고 하면서 고충을 털어내기도 하였고, 이경은 미술기획자에 의하면 “문 작가의 작업방식은 디지털 사진이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감각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이 기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진보다 더 실제 같은 극사실주의 극사실주의(Hyperrealism)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미술경향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그려내는 기법이다. 래디컬리얼리즘. 슈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진이나 실물처럼 극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시간과 극도의 집중, 실력을 요구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극사실주의가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상인 그림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고 매력적인 현대 사회의 세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 관객이 이런 현대시대의 아이러니함을 느끼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껴 그리기'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비판도 회자되고 있다. 극사실주의 회화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사진처럼 재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 현실의 모습을 어떤 해석도 없이 기계적으로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클로스(Close, C.), 에스테스(Estes, R.), 우리나라 출신으로 세계 정상의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김창열 작가가 대표적이다. 김창열 작가는 1972년 파리의 '살롱드메 Salon de Mai' 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 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하면서 물방울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회화작품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애월, 함덕 등에서 1년 6개월 가량 머문 인연을 소중히 여겨 2013년 5월에 시대별 작품 220점을 제주특별자치도에 무상 기증하였고, 이는 2016년 9월 제주 한경면에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을 개관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물결의 시작: 창조를 위한 현실의 부정 현재의 상황을 넘어선 위대한 예술이나 새로운 예술장르의 창조와 출현은 현실의 부정과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에서 출발한다.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에 반하여 나온 것이 낭만주의 음악이듯이, 250년전 당시에는 상상 못하였던 형식인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동시에 하는 파격적인 작품으로 전 세계의 클래식 음악의 방향을 바꾼 베토벤 심포니 또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정형적인 양식을 넘어서 현실의 부정에서 시작하였다. 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상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물결의 시작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현실의 부정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예술은 현실을 넘어선 그 이상을 보는데서 시작해야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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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언택트 (un-tact) 스피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이젠 사람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아니 어려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를 직접 만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심지어는 두렵기까지 하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나 20세기 초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홍콩독감을 비롯해 지난 2009년 신종플루에서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까지.. 사실 이러한 감염병의 세계적인 대 확산 이른바 ‘펜데믹’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의 펜데믹 현상은 전 인류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놓고 있다. 좋은 말로 진화의 거듭이다. 야외 생활에서 실내 생활로, 단체 활동에서 개인 활동으로,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생활 영역이 점점 축소되면서 사회 질서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면이 불가능한 상황이 많아지면서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환경이 제법 익숙해진 요즘이다. 공연, 강의, 축제, 행사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가 이젠 화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직장인들의 근무도 회사가 아닌 집에서 하는 재택 근무로 이어지면서 화상 회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른바 온라인으로 만나는 온택트(on-tact) 시대도 열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스피치’ 역시 최근 들어 비 대면으로 더 많이 이루어질 뿐 여전히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스피치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소통이 예전만큼 원활하지 않아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피로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예전에는 잘 들리지 않아 두어 번 되묻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두어 번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이 많다 보니 들리는 것만 듣게 되고 들리지 않는 것은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에 따라 소통 보다는 불통의 상황이 증가하여 서로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언택트 스피치는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 우선 목소리의 크기가 커야 한다. 다소 의아할 것이다. 현대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시대인 ‘마스크 시대’가 찾아오면서 목소리의 크기를 다시 크게 할 필요가 있다. 마스크라는 장애물이 큰 목소리도 작게 만들고 작은 목소리는 아예 음소거로 만들고 있다. 아무리 발음이 좋아도 들리지 않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들려야 남고 남아야 기억되는 것이다. 과거 80ㆍ90년대만 하더라도 큰 목소리를 강조하며 연사가 두 팔 벌려 외치는 웅변 대회가 성행하며 웅변 학원이 인기를 끌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마스크 장벽이 생겼으니 남는 말이 되기 위해 목소리도 예전 대비 최소 30%는 볼륨을 키우자. 다음은 사람의 눈을 주목해야 한다. 시각적인 요소의 중요도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포(before) 코로나 시대에는 스피커의 능력 중 얼굴 표정을 많이 강조했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하는 애프터(after) 코로나 시대에는 얼굴에서 보이는 게 눈 뿐이라 눈빛이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마치 눈빛 연기를 하는 연기자처럼 눈도 함께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눈으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원만한 소통을 위해서는 아니 더 나아가 영향력 있는 스피커가 되기 위해서는 눈빛으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스피치의 최종 목적은 ‘설득’이다. 예전의 스피치는 대중연설 속 설득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미디어 연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대중을 설득하고 있다. 단지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을 선호한다는 것이지 결국 스피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비대면 시대가 도래 하면서 ‘Un-contact’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되면서 비대면 접촉을 뜻하는 ‘언택트’라는 신조어가 익숙해진지도 오래다. 대면 방식의 만남 횟수가 감소한 것이지 만남 자체가, 더 쉽게 말해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통의 방법이 달라졌을 뿐. 어쩌면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많고 다양한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대적 조건이나 상황에 맞는 대안을 본능적으로 찾고 있다. 스피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대면일 때는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 모두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비대면이 주를 이루는 지금 시대에는 청각적 요소가 더욱 부각되고 시각적 요소 중에서는 얼굴 표정 중에서도 눈빛이나 손짓 그리고 자세가 더욱 더 중요시되고 있다. 가히 ‘마스크 혁명’이라고도 할 만 하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화상으로의 만남으로라도 끊임없이 교류하는 인간에게 얼굴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콘텐츠와 표정이 일치할 때 그 사람의 말은 배가 되기 때문이다. 멋진 스피커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목소리의 볼륨을 높이고 표정은 물론 눈빛으로도 말을 하라!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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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캄보디아와 남ㆍ북한 외교 관계[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필자가 캄보디아에 부임한 2011년 만하여도 나의 지인들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건넨 걱정의 말들을 많이 해주었다. 그들이 염려하는 말은 주로 캄보디아는 사회주의 국가, 가난한 나라, 북한과 형제 국가, 킬링필드 등 부정적인 표현들이었다. 사실 이 말들은 대부분 맞는 얘기지만 일부는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 아마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독자 분들이 계실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캄보디아와 남ㆍ북한의 관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먼저, 캄보디아는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선왕인 시하누크 국왕에 이어 현재는 시하모니 국왕이 국가 원수이고 실질적인 국가 권력은 내각 수반인 훈센 총리에게 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그 유명한 인류 근대사의 큰 비극인 사회주의자 폴 포트에 의한 ‘킬링필드’로 불리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약 200여만 명이 희생되었던 일로 인해서 캄보디아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나보다. 캄보디아는 남ㆍ북한과 동시 수교한 국가 중 하나이다. 한국이 191 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고 북한은 160개국과 수교하고 있는데 그 중 157개 국가가 남ㆍ북한과 동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2021년 4월 현재). 지금이야 대부분의 나라가 친한 정책을 유지할 정도로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격 상승이 이루어졌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친 북한 노선을 유지한 나라들이 많았다. 그 당시, 한국에 비해서 북한과 절대적 우호 관계를 맺었던 국가들로는 중국, 러시아, 쿠바 그리고 동유럽 일부 국가들과 아프리카, 중동의 제 3세계 국가가 있었는데 이 나라 중 일부는 북한과 형제애를 나눌 정도로 특별하고 돈독한 우의를 가졌으니 그 중 하나가 캄보디아다. 캄보디아는 한국과 1997년 수교를 맺었지만 북한과는 1964년 4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캄보디아와 1962년 영사관계를 수립하여 총영사관을 설치하였으나, 1966년 주 캄보디아 일본대사관에 북한의 김귀하 복싱선수가 망명을 요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국 정부는 이 선수의 망명이 한국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나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양국 관계와 일본 정부의 망명에 대한 부정적 대응으로 결국 캄보디아 정부는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북한 선수를 북한으로 강제 송환해 버렸다. 한국 정부는 비 인도주의적 캄보디아 정부의 행태에 대한 항의로 1967년 1월 주 캄보디아 한국 총영사관을 폐쇄하였다. 그렇게 양국은 30년을 외교 공백으로 지내다 1996년 대표부 설치 후 1997년 비로서 대사관을 설치하면서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양국의 외교 관계가 복원되는 '재수교'라고 말하는데 이는 영사 관계와 국교 수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무려 33년이나 먼저 캄보디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니 그둘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캄보디아가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다. 당시 훈센 총리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전략을 위해 한국과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당시 시하누크 국왕은 한국과 1996년 대표부 설치 때부터 국교 수립을 강하게 반대했고 그 반대는 이듬해인 1979년에 국교가 수립될 때까지 이어졌다. 시하누크 국왕의 이런 반대에는 시하누크 국왕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형제의 연을 맺을 정도로 관계가 특별한 것에 그 이유가 있다. 1970년 친미 주의자인 론놀 정부가 쿠테타로 시하누크 국왕의 정권을 무너뜨리자 시하누크 국왕은 해외로 망명하였고 이때 중국(마오쩌둥)과 북한(김일성 주석)이 그를 극진히 맞아 주었으며 특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그와 형제의 연을 맺기까지 하였다. 중국과 북한이 캄보디아와 얼마나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는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중심 상업지역에 가면 ‘마오쩌둥 대로(毛澤東 大路)’가 있고 또 다른 중심가인 뚤꼭 지역에 가면 ‘김일성 대원수 거리’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캄보디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고 시하누크 국왕이 왜 그렇게 한국과의 수교를 반대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또한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초청 국가의 원수인 시하모니 국왕이(2004년 즉위, 시하누크 국왕의 아들) 북한을 의식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해외로 출국해 버리는 초유의 외교적 결례가 있었다. 그래서 국빈 만찬의 주인 역할을 캄보디아 상원의장이 대신한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로도 계속된 캄보디아 왕실의 반한 감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무튼 캄보디아 왕실의 반한 감정이 절정에 달한 이 사건(?)은 외교적으로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외교적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지금은 캄보디아가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북한보다는 한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캄보디아는 한국과 교역량이 2001년 1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지금은 총 교역규모가 352억 달러에 이르고 있고 FTA 협정까지 맺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신 남방정책의 중심에 있는 국가가 되었다. 반면에, 북한과의 관계는 과거 형제 국가인 전통 우방국에서 지금은 캄보디아가 UN의 대북제재를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을 정도로 양국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야말로 일반적이고 상징적인 수준으로 양국 관계가 추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캄보디아는 확실히 험난한 역사를 거쳐 왔다.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던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재현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국가 발전에 매달리고 있다. 또한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나라이다. 그리고 한국이 외교 역량을 집중하고자 하는 메콩강 유역 5개국가 (중국, 라오스, 태국,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에 미얀마를 포함한 메콩강 유역 경제 벨트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심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이다. 한국과 캄보디아는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함께 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양국은 서로 윈윈하는 상생의 결과를 얻으리라고 믿는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던 중, 이전에 소개한 ‘캄보디아 전자 정부 구축에 한국의 기술이 있다’ 글과 관련된 한국의 행안부 담당자가 곧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머잖아 이에 대한 후속 소식을 전할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날로 발전해 가는 한국과 캄보디아 관계만큼 남북한의 관계도 발전되어 통일의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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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정보공개절차[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최근 ㅇㅇ자격사의 시험을 준비하면서 시험과정에서 나온 정보공개제도와 관련한 문제들로 인해 필자 또한 정보공개제도를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의뢰인의 의뢰를 받고 업무를 수임받아 처리를 하는 우리일도 면밀하게 정보공개제도를 활용하고 있음에도 공개제도를 기점으로 업무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점에서 정보공개제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일반인도 필요할 경우 정부 및 법인의 공적자료와 정보를 쉽게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 시켜드리겠습니다. 정보공개제도는 근거법률인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1996. 12. 31.에 제정되어 시행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중심으로 공공기관이 정보공개를 시행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지만, 실제 대한민국은 그 이전부터 토지대장, 지적도 등의 공부자료는 그 이전부터 공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래전부터 공개제도는 있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제도의 본격화는 근거법률 제정을 기점으로 활성화가 되었다는 점은 인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공개제도의 목적은 국민의 알권리 충족, 국민의 국정참여와 행정의 투명성, 신뢰받는 정부구현, 지식, 정보의 자산가치 증대로 국가정보의 균등배분 필요, 부정부패 및 비리방지 효과, 국민의 권리, 이익보호 및 구제 기능이라고 근거법률과 지침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이 요청하는 정보에 대해 권익과 헌법에 보장된 청구권을 충족시켜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정보공개의 대상은 공공기관이 직무상 작성 또는 취득하여 관리하고 있는 문서(전자문서 포함), 도면, 사진, 필름, 테이프, 슬라이드 및 기타 이에 준하는 매체 등에 기록된 사항으로 관련법령 제2조 제1항에 규정하고 있으며, 공개대상을 정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대통령령과 국무총리령을 확인하여 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정부투자기관(각종 공사), 각급 학교, 지방공기업,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의 적용을 받는 정부산하기관(한국감정원, 한국마사회 등),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특수법인(건설공제조합 등), 국가 또는 지방자체단체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사회복지법인 및 비영리법인(사단, 재단) 등 정부로부터 조금이나마 지원을 받거나 타 법률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하는 단체까지도 정보공개대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 법률이라하면 예로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관리되는 아파트 자치 관리규약도 제ㆍ개정 이후 30일이내에 관할지역을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보고되어야 하는데 보고된 아파트 자치 관리규약도 해당아파트 거주자가 정보공개를 청구할 경우 공개를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정보공개대상에서 제외되는 문서는 정보의 존재 자체가 비밀 사항인 경우,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법인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공개시 특정인에게 이익 또는 불이익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등으로 개인정보보호법에 명시된 사항 및 국가 기밀이 아닌 경우는 통상으로 전체공개가 되는 점은 참고하시면 됩니다. 최근에는 ‘정보공개포털’이라는 홈페이지를 통해 손쉬운 가입절차를 통해 정보공개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일반인 또는 정보전문활용가(변호사, 행정사 등)의 정보파악에도 상당하게 많이 작용하는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시간은 정보공개제도 및 공개대상 정보를 이 정도로 소개시켜드리고 다음시간에는 정보공개청구절차 및 불복신청 부분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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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⑤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유배(流配)라는 형벌은 죄인을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일정한 곳에 배속시켜 활동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배는 무기형으로 군주의 사면이나 정치적 변동이 없는 한, 대부분 죽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배지는 408곳이었다. 그중 전라도는 74곳이었고 유배횟수가 915회로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 유배자들에 대한 처우는 유배지마다 모두 달랐다. 어떤 곳은 일정한 거주 지역이 마련돼 있어서 집집마다 날짜를 정하여 돌아가며 먹을 것을 주는 곳도 있었지만 그것은 유배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려가 있었던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개는 유배자가 스스로 의식주를 감당해야 했다. 다산과 이별하고 영광(靈光) 다경포(多慶浦)에서 출발하여 대해를 지나 소흑산도(우이도)에 도착한 손암도 마찬가지였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지역은 유배자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삶도 어려움이 많았다. 영조 38년(1762년)에 전라감영에서 올린 장계에 보면 ‘본도에 정배 죄인이 너무 많아 백성과 유배자가 모두 굶어 죽게 되었으니 타도로 유배자들을 옮겨 주기를 간청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손암이 소흑산도에서 큰 선비로서 주민들에게 학문적 지식을 나눠가면서 존경도 받고 따르는 제자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우이도 자체가 농지가 부족하여 주민들 모두의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신유박해(1801년) 당시의 유배지, 특히 소흑산도의 손암은 더욱 그러했다. 육지로 유배를 간 다산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해남과 가까운 강진이라 먹고 자고 지내는 문제는 물론이고, 유배기간동안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와 학문적 소양을 깊고 넓게 닦을 수 있는 비교적 나은 환경이었지만, 정약전을 비롯한 멀리 떨어진 섬지역 유배자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정약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농사짓는 것도 아니요 고기 잡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글을 아는 것과 글을 가르칠 수 있는 것 밖에 없었다. 다산의 제자 이강회가 쓴 운곡선설(雲谷船說)에 보면 ‘문순득(文淳得)이 말하기를 당시 정공(丁公, 손암)이 기거가 불안하여 자산(대흑산도)으로 옮겨가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손암은 1806년경에 우이도에서 대흑산으로 적거지를 옮기고 사리(사촌)마을에다 서당을 열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얼마 후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 사촌서실이라고 방(榜)을 써서 달았다. 그리고 동생 다산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청해서 오늘날 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3권 기(記)’에 실려 있는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이다. 다음 글은 다산이 지은 사촌서실기의 원문 해석이다. -누에치는 집에 몇 종류의 잠박(蠶箔)이 있는데, 큰 것은 면적이 넓어 잠실(蠶室)의 끝까지 닿고, 작은 것은 잠실의 4분의 1 정도이다. 간혹 잠실을 정(井) 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그 중 한 부분에 잠박을 놓았으나, 누에들은 좁은 상자에서도 오히려 편안히 지내며 여유 있게 살아간다. 지나가면서 이것을 보는 사람이 큰 잠박을 보고는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고, 좁은 상자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빙긋이 비웃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현부인(賢夫人)이 좋은 뽕잎으로 법에 따라 먹이면, 세 번 자고 세 번 깨어나서 성숙한 뒤에는 실을 토해내어 고치를 만들고 사람들은 이 고치를 켜 실을 만드니, 조그만 잠박의 누에라도 큰 잠박의 누에와 다름이 없다. 아, 어찌 누에만 그러하겠는가. 세계도 다 잠박이다. 하늘이 백성을 여러 섬에 퍼져 살게 한 것은 누에치는 아낙이 누에를 여러 잠박에 펴놓은 것과 같다. 우리들이 섬을 잠박으로 생각해 볼 때, 큰 것은 적현(赤縣)과 대하(大夏)라고 할 수 있으며, 작은 것은 일본(日本)과 유구(琉球)라고 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것은 추자도(楸子島)ㆍ홍의도(紅衣島)ㆍ가가도(可佳島) 같은 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이 큰 섬을 부러워하고 작은 섬을 비웃는 것은 잠박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실로 박학군자(博學君子)가 있어 옛날 전적(典籍)을 많이 읽은 뒤에 법(法)에 따라 가르치면, 경전(經典)의 뜻을 변석(辨析)하게 될 무렵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러 사람과도 어울리며 나아가서는 성인(聖人)도 되고 현인(賢人)도 되며, 문장학(文章學)을 익힐 수도 있고 경세학(經世學)을 익힐 수도 있을 것이니, 조그만 섬의 백성들도 큰 섬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나의 형님 손암 선생(巽菴先生 손암은 정약전(丁若銓)의 호)께서 흑산도(黑山島)에서 귀양살이한 지 7년이다. 어린 아이들 대여섯 명이 형님을 따라 서사(書史)를 배웠는데, 얼마 후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고 방(榜)을 써서 달았다. 그리고 나를 불러 기(記)를 지으라고 하기에 누에치는 잠박으로 비유하여 아뢴다. 가경(嘉慶) 정묘년(1807) 여름에 지음 - 이 글은 가경 정묘년 여름에 다산이 지었다. 이 때는 1807년(순조7년) 여름을 말한다. 내용을 보면 당시에 누에를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잠박(蠶箔)은 누에를 키우는 채반을 말한다. 잠실은 이 누에채반을 늘어놓는 방이다. 집집마다 누에를 칠 때 어떤 집은 잠실에 가득 잠박을 펼쳐 놓고 키우는데 어떤 집은 잠실의 4분의 1정도만 놓았고 어떤 집은 가난해서 잠실을 우물 정자 모양으로 방을 9등분을 해서 한쪽에만 잠박을 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조그만 잠박의 누에라도 현명한 부인이 좋은 뽕잎으로 법에 따라 잘 먹이고 잘 키우면 큰 잠박의 누에와 다름없이 좋은 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어서 아, 어찌 누에만 그러겠는가. 세계가 다 잠박이고, 세계가 다 누에 키우는 것과 같다. 하늘이 백성을 여러 섬에 퍼져 살게 한 것은 누에치는 아낙이 누에를 여러 잠박에 펴놓은 것과 같다.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이 큰 섬을 부러워하고 작은 섬을 비웃는 것은 잠박에서와 마찬가지이지만 훌륭한 군자(君子)가 있어 법에 맞게 가르치면 성인이나 현인도 될 수 있을 것이니까, 조그만 섬의 백성들도 큰 섬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 새겨보면 아이들 대여섯 명을 데리고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는 형님의 이 조그마한 서실을 세상의 크고 좋은 서실들과 같은 높이에서 비교하며 격려하고 치켜세우는 문장이다. 잠실도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지만 누에가 자라 명주실을 뽑는 데는 차이가 없듯이 큰 서실이든 작은 서실이든 간에 누가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섬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높은 학문과 인격을 구비한 훌륭한 우리 형님이 가르쳐주니까 인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논조다. 이것은 형님의 학문을 은근히 높여주는 재기가 넘치는 표현이다. 다음은 허경진 교수(연세대학교)가 해석한 ‘손암 정약전 시문집’ 32제 40수의 시(詩) 중에서 22번째 제(題)의 시이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지은 시에 차운하다 (次兒輩晨起韻) 유리 같은 하늘에 반짝이던 별 드물어지고 琉璃天色爛星稀 닭울음소리 세 번 들리자 옷 입고 일어나네 三度鷄鳴起整衣 엄격한 과정 배우려면 느슨하게 할 수 없어 只爲嚴程鬆不得 가물거리는 등잔불로 아침 햇살을 기다리네 一燈殘焰待朝暉 손암은 젊은 시절에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성정이었으나, 남인 소장학자들과 교유하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나서 등과와 입신을 위한 주자학류의 학풍보다, 유교의 근본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에 전념하였다. 다산이 설명한 대로 손암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진리의 근원에 도달하고자하는 심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사촌서당의 아이들 글에 차운한 이 시에는 손암이 솔선수범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는 엄숙하고 근면한 스승의 풍모가 배어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