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
[전문가 컬럼] 예술관광의 수범사례 :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예술관광의 수범사례 :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 제주예술관광 피아노박물관 피아노도슨트 제주도 서부지역 안덕서광마을에 위치한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 (회장 김영락, 관장 김학수) 에서 작은음악회가 개최되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아노도슨트 음악회로 볼수 있는데, 이 음악회는 올해 4월부터 매주 토ㆍ일요일에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어 어느덧 50여 회를 넘어서고 있고 프로그램은 대중성과 전문성을 골고루 겸비하여 서양음악사와 접목한 피아노도슨트 음악회로 이미 주요 음악잡지와 신문사에서도 주요하게 다루어 전국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음악회는 피아노 해설과 음악연주를 겸한 도슨트 프로그램으로 피아니스트 김미경 감독의 진행과 해설 및 연주로 진행되었다. 김미경 감독은 제주출신으로 제주대와 한양대 교육대학원에서 피아노와 음악교육을 전공한 전문가로 타 언론 및 음악전문 잡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피아노 전문 도슨터로 소개되고 있다. 피아노도슨트는 마치 작은 음악회를 방불케하였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곡에서부터 쇼팽과 리스트의 낭만음악을 물론이고, 비틀즈와 퀸의 유명 팝송과 현대의 재즈 음악까지 그야말로 피아노 음악의 종합선물이었다. 맛깔나는 피아노 해설은 단순 피아노 소개만을 하는 차원이 아닌 서양음악의 역사에 바탕을 둔 고전음악과 낭만음악을 관통하고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마치 하나의 영화처럼 꾸며놓았다. 문화ㆍ예술ㆍ관광 및 언론의 관심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 소장박물관으로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의 아이디어와 컨셉 및 여러 조각가들의 협업으로 조각된 전 세계 단 하나뿐인 진귀한 피아노를 비롯해 베토벤, 쇼팽, 하이든 등 위대한 음악가들이 사랑했던 피아노의 특별한 스토리와 3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피아노 예술품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박물관에는 베토벤이 선호한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사 피아노를 비롯해 하이든, 쇼팽, 리스트 등 세계적인 음악 거장들이 즐겨 사용하거나 칭송한 제작사의 피아노가 전시됐다. 박물관 내에서는 어린이들이 직접 피아노를 치거나 지휘를 하는 등의 체험 공간도 운영된다. 전시된 자동차와 피아노 관람과 더불어 어린이 교통체험과, 음악 체험 프로그램, 곶자왈 숲 산책로 힐링로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기도하다. 아래는 관련한 언론보도 내용이다. ▲동아일보 2022년 11월 27일 : 이 박물관에서는 최초의 자동차부터 벤츠, 롤스로이스 등 전 세계에서 수집된 100여 대의 클래식 자동차를 만날 수 있다. 피아노박물관은 베토벤, 하이든, 쇼팽, 리스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피아노들이 전시돼 있다. ▲경향신문 2019년 7월 19일 : 로댕이 조각한 세계 유일 피아노 전시 ‘제주피아노박물관’ 개관 : ‘생각하는 사람’ 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1840년~1917년) 이 조각한 세계 유일의 피아노를 만날 수 있는 박물관이 제주에서 문을 열었다. 피아노 박물관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굿스테이지 2023년 5월호 : 제주도에는 한참 동백꽃이 만발했다. 바람이 살랑이는 동백나무 아래 그녀는 터다란 눈망울에 시원한 웃음으로 기자를 반겼다. 피아니스트 김미경. 그녀는 제주도피아노박물관에서 피아노 도슨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녀는 오래된 피아노를 조심스레 만지고 연주하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아노의 역사가 서양음악사이다. 김미경 프로필 ♤제주도 안덕(서광) 출생 ♤제주대학교 음악학과 졸업(전공: 피아노, 중등 정교사 2급 자격증 취득)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전공: 음악교육, 석사논문: 국악활성화 연구) ♤이탈리아 단기 음악치료 과정 수료(2019년 2월, 이탈리아 피렌체) ♤하우스매니저2급 자격증취득(2023년 4월, 한국공연장매니저협회) ♤현재) 문화기획 나무 대표,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 도슨터, 문화칼럼니스트(한국복지신문, K-클래식뉴스), 음악회 해설가 ♤주요경력: 다수의 합창단 및 음악 반주 및 협연(피아노), 음악공연 콘서트가이드, 해설음악회 진행, 교회 성가대 반주자 등 ▲리뷰 2023년 3월호 : 국내최초의 유일무이한 피아노 도슨트 : 대한민국의 이만한 피아노박물관이 또 있있을까? 제주피아노박물관은 전혀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이다. 전시해 놓은 33대의 피아노 중 대부분이 여전히 피아노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미경 도슨트는 각 피아노의 탄생배경과 발달과정을 설명하면서 해당 피아노를 하나씩 연주해 주었다. ▲제주일보 2022년 11월 8일 : 깊어가는 가을, 제주가 관악의 향연으로 물든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원회가 18일부터 21일까지 제주아트센터, 서귀포예술의전당, 세계자동차ㆍ피아노박물관에서 2022 제주국제관악제 가을 시즌을 개최한다. 가을 시즌은 크게 앙상블 공연과 라이징스타 콘서트, 세계토속 관악공연, 박물관 관악제로 준비됐다. ▲제주의소리 2023년 8월 1일 : 제주국제관악제는 제주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 서귀포예술의전당, 제주해변공연장, 서귀포천지연폭포 야외공연장, 꿈바당어린이도서관, 사려니숲야외무대, 세계자동차ㆍ피아노박물관, 도두마을공연장, 제주혼디누림터 등 제주 전역을 아우른다. 창업자의 지역 위한 봉사정신과 희망 제주도 안덕 서광마을에 개관한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의 창업자 김영락 회장은 개인소장으로서는 아시아 최초로 2008년에 자동차박물관을 개관하였고, 이어 2019년 한국 최초로 피아노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전시된 피아노는 김영락 회장이 2013년부터 전 세계를 돌며 6년에 걸쳐 수집한 것이다. 현재는 김영락 회장의 뒤를 이어 김학수 관장이 맡아 운영하고 있고 지역 발전을 위한 다양한 후원과 봉사를 통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락 회장은 “기술 문명의 총아인 자동차와 고귀하고 우아한 피아노를 통해 자라나는 세대가 꿈과 희망을 키우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지나온 세대에 대한 존경과 다가올 세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매주 2회 열리는 피아노 도슨트 작은 음악회는 이 박물관을 빛나게 해주는 존재이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창업자 김영락 회장과 김학수 관장의 희생정신과 박물관에 대한 철학, 지역에 대한 봉사정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역사와 문화ㆍ예술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의 장이 되도록 도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자동차피아노박물관이 우리의 것이라는 공익의 목표에 도민 모두가 공감하기를 기대해 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용도폐지 절차의 규정화[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필자가 앞서 설명드린 사설에서 용도폐지에 대해서 설명드린적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반인 입장에서는 용도폐지에 대한 사항뿐만아니라 용도폐지란 용어 자체도 생소한 언어일 수 있습니다. 용도폐지가 언제 해야하고, 용도폐질 자체를 왜 하는지 모른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 오늘 조금 더 보충할 수 있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용도폐지란 말 그대로 사용용도가 다하였거나, 사용용도로 사용하지 않는 기반시설 즉 도로 및 구거 등의 공공재 시설이 본래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할 때 신청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용도폐지 신청자의 경우는 시민 또는 국민이 대다수 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반시설을 정비하는 허가관청에서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사항으로 기반시설을 설치 또는 계획이후 5년 이상동안 기반시설로 사용하지 못하거나 시설을 설치는 하였으나, 시설을 사라진 경우 허가관청에서 임의로 변경 가능함에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허가관청 자체에서 자조적으로 기반시설의 용도폐지를 추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필자도 이 부분에서 왜 허가관청의 자조적 관리가 안되는지 매우 궁금하며, 현재도 스스로 왜 안하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용도폐지를 왜 해야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국유재산법' 및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법률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재산을 ‘행정재산’ 과 ‘일반재산’ 으로 크게 구분하여 관리합니다. 세부적으로 ‘행정재산’ 은 여러 가지 분류로 구분되어 있지만, 여기까지는 아실 필요가 없으며, ‘행정재산’ 일 경우는 그 사용목적이 유지되는 한 절대 매매 등의 양수가 불가한 재산으로 지방도, 다리, 공공시설 등이 이에 포함되어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재산입니다. 이러한 행정재산을 일반재산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행정절차가 용도폐지 절차로써 예를 들면 구거의 목적으로 설치 또는 계획되어 있는 토지가 수십 년간 구거로 사용되지 못하여 일반인들이 건축 및 구조물 설치로 그 본래의 사용목적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신청하는데 가장 먼저하는 행위가 용도폐지신청입니다. 용도폐지를 검토하거나 승인해주는 허가관청은 처리기간 제한없이 수일에서 수개월 (필자의 경험은 2년이 넘는것도 있었음) 을 진행하며, 용도폐지 절차로 용도폐지 신청이후 토지경계확정측량 및 용도폐지 검토 중 토지분할 측량 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하는 행정신청절차라고 하여 금전적 지출이 없다고 시도하시는 분들도 측량으로 지출되는 금전이 수백만원 이상이 나와 놀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도폐지의 승인이 있더라도 통상의 행정재산은 일반재산으로 전환될 경우 한국자산공사로 관리가 이관됨에 따라 용도폐지 승인 이후 한국자산공사를 상대로하는 매수절차를 완료해야만 개인의 소유토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기하셔야 합니다. 매수절차 또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토지라고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최근에는 감정평가를 통해 실제거래싯가 정도로 매입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용도폐지 절차 중 현행법상 개정이 되어야 할 사항이 아직도 산적되어 있습니다. 법률적 처리기간이 미지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용도폐지 신청이후 길게는 수년간을 기다려야 하며, 허가관청으로부터 용도폐지를 거부처분이 나오더라도 행정심판 및 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아 한 번 신청 후 정권 및 담당자가 교체되기 전까지 기달려야하는 아주 부당성이 상존되고 있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 순탄치 않은 콘스탄체와의 결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은 지난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양쪽 집안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1782년 1월 1일, 모차르트와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은 콘스탄체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모차르트 손에 이끌려 돌아 온 콘스탄체를 본 베버 부인은 딸을 껴안고 기뻐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대로 바로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차르트에게는 가난한 음악가에게 내 딸을 보낼 수 없으니 돈이나 열심히 모으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모차르트는 당장에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이 주선해 준 폰 트라트너 부인과 치히 백작부인 등 세 명에게 한 달에 6두카트(120만 원 상당)씩을 받기로 하고 끔찍이도 싫었던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음악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요제프 2세 황제의 막내동생)의 궁전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에게는 계속해서 설득의 편지를 보냈다. 그즈음 잘츠부르크의 가족들은 모차르트가 체칠리아 부인의 꾐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빈에서의 모든 사건을 베버가족의 음모라고 믿는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1월 3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아주 급하게 씁니다. 지금은 밤 10시 반입니다. 토요일까지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걸 부탁드려야 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밖에 쓸 수가 없으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도메네오, K 366’의 오페라 대본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발표회는 사순절의 제3일요일에 열립니다. 그래서 즉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라 ‘후궁탈출, K 384’는 잠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글루크의 큰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와 ‘알체스테’를 위한 것 가사 중 꼭 고쳐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늦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절이 지나면 곧 상연될 겁니다. 이제는 펜을 놓아야 합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겠습니다(이걸 쓰지 않았다가는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제가 사랑하는 콘스탄체가 그런 심한 생각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런 나쁜 마음의 여자를 사랑하는 짓은 할 수 없다는 걸 꼭 믿어주시겠죠. ..... 우리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최고인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만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속히 그곳에 갈 일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씨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든든한 지지자 슈비텐 남작을 만나다 바쁘고 힘든 일상이 이어지던 중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 황제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소중한 지지자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G. F. Van. Swieten, 1733~1803)을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주치의가 된 아버지를 따라 빈으로 와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테레지움이라 불리는 엘리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을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에게 발탁되어 외교관, 도서관제도 혁신가 등 정부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슈비텐 남작은 외교관 시절부터 시간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매우 열정적인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을 발전시켰다.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흠모하여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구하였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반 베토벤에 대한 후원자로서 음악역사에 기록될만한 헌신을 하였다. 1782년 1월 27일, 26살이 된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장 슈비텐 남작이 기거하는 공관에서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며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슈비텐 남작은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팀을 주도하는 실력자로서 모차르트에게 “이곳을 매주 일요일 정오에 음악가들에게 개방하겠다. 당신의 작품들과 바흐, 헨델의 음악을 연주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정수에 도달했던 바흐 음악과의 교감을 통해 커다란 음악적 영감을 얻게 되었다. 슈비텐 남작에 의해 황실 도서관에 고용된 모차르트는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수십만 권의 모든 도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빈에서 얻은 이 기간 동안에 모차르트는 대위법을 활용하여 소나타 형식의 작곡을 능숙하게 익혀 자신만의 음악 색채를 만들어냈다. 슈비텐의 일요음악회에는 빈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여했는데 요제프 하이든도 그 중의 일원이었다.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 이외에도 갈리친 후작(Prince Nikolai Borisovich GalitzinGolitsyn, 1794~1866)의 후원으로 그의 살롱에서 매주 두 번씩 연주를 했다. 갈리친 후작은 러시아 귀족 가문으로 아마추어 음악가이며, 특히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3개의 현악 4중주(Op. 127, 130, 132)를 의뢰한 음악 후원자로 유명해졌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4월 1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이달 2일의 편지에 따르면 모든 걸 무사히 받으셨다죠. 아버지는 시곗줄과 담뱃갑, 누나는 2개의 모자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담뱃갑도 시곗줄도 제가 산 게 아니라, 모두 사파리 백작이 보내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콘스탄체에게는 두 분의 안부 말씀을 전했습니다. 콘스탄체는 그 답례로 아버지 손에 키스를, 누나에게는 마음으로부터의 포옹을 보내며, 두 분의 친근한 벗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2개의 모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의 소망이었으니까요. ..... 제가 분명 황제 밑에서 일하게 되리라는 소문에 대해 쓰셨는데, 그런 일을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저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온 거리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게 축하의 말을 건넨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황제께서 계신 곳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고,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걸 저는 기꺼이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황제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데까지 와 있다는 이야기니까, 제가 그 때문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딘 것도 아닙니다. …… 저는 일요일마다 12시에 슈비텐 남작에게 가는데, 그곳에서는 헨델과 바흐 이외의 것은 전혀 연주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흐의 푸가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것만이 아니라 에마누엘과 프리데만 바흐, 그리고 헨델의 것도요. 그리고 저는 남작에게 에벌린(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잘츠부르크의 악장)의 것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영국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대 바흐의 아들)가 별세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음악계로서는 아쉬운 일입니다! 슈비텐 남작과 일을 하며 바흐의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미 서로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진 서신이 수차례 오고간 터에 상대적 소외를 깊이 느끼고 있는 두 사람의 불화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는 듯한 아버지의 침묵에 조급해진 모차르트는 결혼식 날이 임박해 오자 거듭 결혼 허락을 애걸하는 글을 보냈다. 1782년 7월 16일, 오페라 ‘후궁탈출’이 개막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드디어 레오폴트의 답신이 모차르트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7월 31일 26일자 편지를 오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오페라 ‘후궁탈출, K 384’가 호평이었다고 알려드린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이 담기지 않은 쌀쌀한 편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빈에서 누구나 더는 다른 걸 들으려 하지 않겠다는 듯 대소동이 벌어지고, 극장을 언제나 가득 채워놓은 아들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나머지 보퉁이를 여는 손도 들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4번째 공연이 열렸고 금요일에도 또다시 열립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럴 틈이 없으셨던 거겠죠…… 그동안 저의 지난번 편지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는 제 결혼에 동의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니, 실제로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편지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콘스탄체 베버)은 훌륭한 부모에게서 난 정직하고 착실한 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저에게 써 보내신 일, 물론 앞으로 쓰시는 내용이 모두 호의에서 나온 조언일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얼마나 훌륭하고 친절한 것이든 한 여자하고 여기까지 와버린 인간에게는 도무지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미루어놓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반듯하게 정비하고 성실한 남자가 되어야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보답해주시겠죠. 저는 자신을 비난할 만한 일은 일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마침내 결혼 1782년(모차르트 26살, 콘스탄체 20살) 8월 2일, 모차르트는 결혼 예고 절차를 면제해달라는 청원서를 교구에 제출하고, 콘스탄체와 함께 호엔 브뤼케의 테아티너 수도원으로 가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결혼서약서에 서명했다. 8월 4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허락과 축복을 받지 못한 채 성 슈테판 대성당 엘리기우스 소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은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 두 사람의 후견인이자 증인인 토르바르트, 모차르트의 어릴 적 친구인 빈의 외과의사 프란츠 길로프스키, 막내 처제 조피, 콘스탄체의 손을 잡고 모차르트에게 인도한 지역 참사관 헤르 폰 체토, 그리고 몇 명의 신랑 들러리가 전부였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결혼 허락 소식은 결혼식을 마치고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피로연을 가질 때 도착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고급화 전략의 문화관광산업 오페라하우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고급화 전략의 문화관광산업 오페라하우스 중국 광저우 브랜드 문화예술공간 중국 남부 광둥성에 위치한 광저우는 장대한 역사와 현대적인 도시문화가 어우러진 지역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우뚝 솟은 광저우타워를 비롯하여 광둥의 전통 건축양식인 진씨서원,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 중 하나인 광효사 등 다양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도시이다. 특히, 세계 10대 오페라하우스의 하나로 평가받는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1,800석 규모의 대극장과 400석 규모의 소극장 등이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으로 2011년 개관하였다. 건축 비용은 약 미화 2억 달러 정도로, 공사기간은 8년이 소요되었고, 공연장의 가장 중요한 음향은 마샬데이 어쿠스틱스(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이 설계하였다. 우주선 모양의 DDP나 조약돌을 소재로 건축된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어찌보면 유선형으로 비슷해보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세계5대 오페라하우스라고하면, 이태리 밀라노 라스칼라극장, 프랑스 파리오페라극장, 영국 런던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 오스트리아 빈국립오페라극장을 꼽는다. 한편, 2000년 이후 문화ㆍ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은 놀랄만한 경제력으로 오페라하우스 건축 바람을 타면서, 하나를 새로 짓더라도 최첨단 다자인과 최고급 시설의 건물을 짓고 있다. 2008 베니징올림픽을 기념하여 건축한 베이징국가대극원(2008년), 하얼빈오페라하우스(2006년), 주하이 오페라하우스(2007년), 우시 대극원(2009년) 등이다. 미테랑의 문화정책 및 철학 프랑스 문화정책의 기반을 다지고 체육과 음악, 건축과 미술 등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정치와 정책에 입안하였던 인물이 바로 미테랑 대통령(1916~1996년)이다. 그가 집권한 1981년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고, 기업들은 과잉 설비투자로 적자에 허덕였고 국민은 높은 실업률로 힘겨운 상황이었다. 프랑스 국민은 좌파 대통령 미테랑이 비전과 카리스마로 이 같은 시름들을 한 방에 날려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미테랑이 집권하자마자 치켜든 것은 종합예술의 상징인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는 현대화된 오페라극장 건립이었다. 결국, 40여 년이 지나서 파리는 세계 문화ㆍ예술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이는 '문화강국 프랑스'를 기치로 1980년대부터 문화ㆍ예술 공간 중심의 문화정책을 국민과 함께하게 만든 미테랑 프로젝트인 '그랑 프로제'(Grands Projets) 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은 세계 문화최강국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특히, 그가 집권한 대통령 14년의 임기 중에 환상의 정치적 콤비이자 하원의원인 자크 랑을 12년 동안 문화부장관 자리에 앉히면서 문화강국 프랑스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는 정치경제 위기를 문화ㆍ예술을 통해 기회로 풀어낸 미테랑의 문화마인드와 문화철학이 빚어낸 결과였다. 우리나라 또한 전 세계적으로 바람을 일으키고있는 넥플릭스 및 영화와 한류, K콘텐츠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정상의 반열에 이르게 된 이면에는 백범 김구와 이어령 초대문화부 장관과 같은 문화크리에이터이자 문화의 중요성을 통찰한 철학적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백범은 백범일지와 그의 인생철학의 하나인 ‘문화의 힘’에서 부국의 원천을 문화에서 보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학 이어령은 그의 문화론과 철학에서 우리나라가 가야할 방향을 창의적 아이덴티티와 다양성의 문화에서 강조하였다. 고급 문화관광산업 오페라하우스 최근 1년 동안에 우리나라 문화면을 장식한 키워드를 보면, 한류, K콘텐츠, 오페라하우스라는 단어가 가장 눈에 띄인다. 올해 특별도로 승격한 강원특별자치도에서는 원주시장이 제안한 혁신도시의 옛 종축장 부지 내 2,500석 규모의 ‘강원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제안하였고, 울산시는 태화강 위에 가장 규모가 큰 세계적인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인천시는 송도국제도시에 2018년에 ‘아트센터인천’을 개관하였고, 향후 2단계로 2000억 원의 예산으로 오페라하우스와 박물관 건립을 건립 중이다. 또한, 부산시는 2,500석 규모의 오페라하우스를 목표로 영도구에 진행 중으로 중ㆍ소극장과 전시공간 및 국제회의실이 갖추어진 세계 정상의 복합 문화ㆍ예술 공간으로 계획되고 있다. 위의 오페라하우스의 공통점을 보면, 지자체와 대기업 협력으로 복합 문화공간의 양식으로 설계되고, 해안에 위치하고있어 문화ㆍ예술 공간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문화와 관광을 접목한 문화관광 산업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브랜드 이미지를 활용한 해외의 사례로는 2천년대 이후 건축된 중국의 베이징, 하얼빈, 광저우에 건축된 대형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하여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의 독특한 건축의 문화ㆍ예술 공간,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극장 또한 복합 문화ㆍ예술 공간으로 건축된 유사한 사례이다. 오페라하우스는 문화ㆍ예술 공간 그 이상의 파급효과를 나타낸다. 문화와 예술 뿐만이 아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 여성 및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화복지, 관광 및 경제와 연계한 차세대 먹거리 분야 등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내보다는 글로벌을 목표로 방향설정이 되어 있으므로 글로벌하면서고 지역을 브랜드 할 만한 세계적인 복합 문화ㆍ예술 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예술로 다양한 국내ㆍ외 문물을 받아 들여 국내시장보다는 해외시장에 초점을 맞추며 고급 국외 방문객을 확대해야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문화ㆍ예술이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파급효과이기에 그러하다. 5년 이후를 보는 것이 아닌 50년 이후 지역의 방향과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국가 지도자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거점시장의 규모는 어떻게 구할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거점시장의 규모는 어떻게 구할까? 창업기업이 시장 세분화를 통해 기업의 자원과 역량, 경쟁상황등을 고려하여 공략할 거점시장을 선택했다면 거점시장의 규모를 측정해 보아야 한다. 거점시장의 규모는 목표지점을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핵심지표다. 시간이 흐르면서 추정치는 계속 변하겠지만 정확한 방향을 조준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대략적으로라도 시장 규모를 파악한 후 점차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현명하다. 거점시장에서 총 유효시장 규모란 시장점유율이 100%에 도달했을 때 달성 가능한 년 매출액이다. 총 유효시장 규모는 4단계로 측정한다. 1. 먼저 상향식 접근방법으로 시장조사 자료를 분석해 사용자 규모를 추정한다. 2. 추정한 사용자규모를 하향식 분석으로 검증한다. 3. 고객 1인 당 발생하는 년 매출을 산정한다. 4. 사용자 수에 한사람 당 매출액을 곱하면 총 유효시장의 규모가 나온다. 상향식 방식은 고객의 목록이나 협회 등 여러 정보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잠재고객 수와 최종사용자의 규모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인적사항 등 잠잭고객의 구체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를 인구조사 방식이라고도 한다. 하향식 방식은 시장분석 보고서 등 2차 자료에 의지해 최종사용자 규모를 추정하는 방식이다. 하향식 분석은 두가지 이유에서 상향식 분석을 보완하는 역할로만 의미가 있다. 첫째, 하향식 접근은 결과 검증이 쉽지가 않아 최종사용자 수를 과정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하향식 분석에 치우치면 고객은 안중에도 없고 숫자 놀이에 빠질 가능성 있다. 총 유효시장의 규모를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고객 1인 당 연간 매출액은 잠재고객의 예산을 근거에 추정하는데 고객의 지불의사 추정에는 몇 가지 가정을 필요로 한다. ▲고객이 동일한 가치를 얻기 위해 현재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얼마인가? ▲과거에 신제품을 출시했을 때 얼마를 지불했나? ▲내가 잠재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창업가는 시장크기와 점유율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 시장은 예상보다 작고 점유율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추정규모가 50억 원 이하라고 말하면 실제로는 더 작을 거라고 예상한다. 규모가 작은 시장에서 흑자를 기록하며 성장을 위한 변곡점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다. 50억 원 이하 시장이라도 초기에 시장 제압이 가능하고 이익률이 높으며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은 시장이라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기반으로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면 거점시장으로는 충분하다. 시장규모 예측은 성공적인 사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단계이다. 숫자와 근거를 잔뜩 기대하는 투자자나 협력기관들에게 사업 아이템 혹은 기술을 제안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장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창업기업은 자원과 역량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장 유효한 거점시장을 선정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㉙ 모차르트의 결혼2[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콘스탄체의 언니 알로이지아를 먼저 사랑했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1778년(22살) 1월 초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는 연주여행 중에 만하임에서 처음으로 베버 가족을 만났다. 지인들의 소개로 악보를 베끼기 위해 베버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이 계기였다.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로돌린 베버는 독일 국민 가극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이자 피아노 독주곡 ‘무도회의 권유(1819년)와 가극 ’마탄의 사수(1821년)등으로 유명한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아버지와 사촌 간이었다. 2년 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관 비서관 일을 하다가 직장을 잃은 그는 오페라의 베이스 가수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악보를 필경해 주거나 무대의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집에 갔을 때마다 음악활동과 여행에만 몰두하느라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가족들의 정을 느꼈다. 콘스탄체 베버는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 1733~1779)의 셋째 딸이었다. 모차르트는 처음에는 콘트탄체 보다 먼저 그녀의 언니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다. 베버와 그의 부인 체칠리아에게는 딸이 넷 있었다. 큰딸 요제파는 20살로 체격이 크고 건강했다. 둘째 딸 알로이지아는 18살로 용모가 예쁘고 가창력이 매우 좋았다. 콘스탄체는 16살, 막내딸 조피는 15살이었다. 네 자매는 모두 뛰어난 성악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알로이지아의 언니 요제파는 화려한 기교와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1791년에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 초연 때 ‘밤의 여왕’역을 맡았고 이 배역을 43살까지 해냈다. 베버의 가족들과 친해지다 알로이지아는 이미 기성 성악가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궁정극장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악보 필경 주문을 위해 베버의 집에 드나들며 베버의 딸들과 친해져서 같이 노래하고 피아노를 반주해 주던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랑을 느꼈다. 1월 말에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5세의 누이 카롤리나 공주가 개최하는 음악회에 초청을 받은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에게 연주비의 반을 주겠다고 제안하여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와 함께 소요시간이 10시간이나 걸리는 네덜란드령 키르히하임볼란덴 성으로 갔다.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오페라 '루치오 실라'의 아리아 두 곡을 불렀다. 악보는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가 필사해 주었다. 연주는 호평을 받았고 금화 8루이를 받았다. 약 3개월을 만하임에 머무르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떠날 때에도 모차르트의 머릿속은 온통 알로이지아(18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10개월 후 파리 생활 중에 어머니를 여읜 모차르트가 장례식을 마치고 홀로 잘츠부르크로 출발했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간절한 바램이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중간에 만하임으로 가 베버 가족을 찾아갔다. 베버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은 모차르트는 다시 뮌헨으로 향했다. 그동안 베버 가족들의 상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알로이지아로부터 사랑을 거절당하다 프리돌린 베버는 다시 직장을 구해 식구들을 이끌고 뮌헨으로 거처를 옮겼다. 알로이지아도 뮌헨에서 프리마돈나로 성공하여 큰 수입을 올리며 오페라 무대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격식을 갖추어 알로이지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이미 성공하여 뮌헨 궁정악단에서 1,000플로린(18세기 통화기준 환산: 약 5천만원)을 벌고 있고, 앞으로도 더 큰 성공에 대한 꿈에 부풀어있던 그녀는 재능은 있으나 미래가 불분명한 청년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낙담했으나 담담하게 행운을 빌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선물을 전했다. 6개월 전 전했던 미완성본 악보의 마지막 완성본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알로이지아의 아름다운 음성과 음역에 맞도록 맞춤 작곡한 알로이지아를 위한 연주용 아리아 '테살리아 사람들이여!(Popoli di Tessaglia! K.316)'였다.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성악가들의 즐겨 노래하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다음 글은 모차르트가 청혼을 거절당하기 반년 전에 미완성 아리아 악보를 알로이지아에게 일부만 보낼 때 썼던 편지 내용이다. 존경과 사랑, 걱정과 위로가 넘쳐흐르는 사랑에 빠진 애틋한 젊은 청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파리에서, 1778년 7월 30일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부탁한 아리아를 위한 변주곡을 이번에는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의 편지에 가능한 한 속히 답장을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그 뒤에 쓸 시간이 없어졌고, 그래서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편지로 꼭 보내겠습니다. ..... 그리고, 이 기회에 거의 절반가량 되어 있는 아리아 '테살리아 사람들이여' - 소프라노를 위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K 316(300b)도 보냅니다. 보고 나서 혹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만족해주신다면 나도 행복하겠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했노라고 당신 스스로의 반응을 들을 때까지는(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쓴 곡이므로,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칭찬을 듣고 싶거든요), 그때까지는 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 가운데 이 장면이 지금까지 만든 것 중 최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나의 '안드로메다'의 1막‘아, 그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Ah, lo previdi)’에 열심히 정력을 기울여주신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장담하건대, 그 막은 당신에게 딱 어울리고 당신의 이름을 크게 높여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감정을 표현하길 권합니다. 가사의 의미와 강도를 잘 생각해서, 진심으로 안드로메다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 자신이 된 기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낸다면, 당신의 그 대단히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창법으로 노래한다면 단시간에 틀림없이 멋진 일이 일어날 겁니다. 이번에 드리는 편지는 대체로 내가 당신에게 이 막의 노래와 서창(敍唱)을 어찌 해주시길 바라는지, 그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때까지 직접 이를 연구하시길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차이를 이해하게 되어서, 당신은 크게 향상될 겁니다. 물론, 고치거나 새로 해드릴 부분은 별로 없을 것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스스로 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연구한 아리아 ‘Non so d’onde viene K.294‘에 대해서는 내가 트집 잡거나 고치거나 할 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대로 맛깔스러운 기법과 표정으로 노래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역량과 지식을 전폭 신뢰합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능력이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 말이죠. 다만 권해드리면서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부디 내 편지를 여러 번 되읽고, 내가 조언한 대로 해줬으면 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말하고 또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을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뜻이 없음을 믿고 안심해주십시오. 친애하는 친구여,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몸 상태에 신경 써주십시오. 건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니까요. 나는 몸에 관한 한, 고맙게도 튼튼합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능이 언젠가 정당하게 인정받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기까지는, 결코 편안해지지 않겠죠. 그러나, 내가 가장 기쁜 상태가 되는 때는, 당신과 다시 만나 진심을 다해 포옹하는 최상의 기쁨을 맛보는 날입니다. 이것이 또한 내가 그리워하고 바랄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다만 이 희망과 징조 속에서만, 유일한 위로와 평안을 발견합니다. 부디 때때로 편지 주십시오. 당신의 편지에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 가장 친애하는 친구여,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너무 기다리게 하거나 애타게 하거나 하지 마시길…… 당장에라도 소식 전해주시길 바라면서, 당신 손에 키스를 하고, 마음을 담아 포옹합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의 성실한 친구, W. A. 모차르트 저를 대신해서, 어머님과 누님, 여동생 등 모든 사람을 포옹해주세요.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무연고 묘 개장절차[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명절이 가까워짐으로써 문의하시는 사항 중 묘지의 개장절차에 대한 사항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바쁘게 살아가면서 고향에 대한 관심보다 생계 유지를 위해 신경쓰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어쩔 수 없이 선산 및 가족보유의 임야를 상속받아 벌초부터 산 관리를 자신이 직접하다보니 언제 자신의 산에 원인이 없는 다른사람의 묘지가 설치된 사항을 늦게 확인하시고 어떻게 할지 몰라 필자를 찾아와 상담하시는 분들이 많아 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위 사항같은 경우 어떻게 조치를 하는지 대해 도움을 드리고자 무연고 묘 즉 후손이 없는 묘에 대한 개장절차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통상 묘지관리된 분묘는 유연고 묘(후손이 있는 분묘), 무연고 묘(후손이 없는 묘)로 구분이 됩니다. 유연고 묘는 설치의 근거, 정황, 주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처음에는 유연고 묘의 소유자와 협의를 시도하여 해결하다가 협의가 안되는 경우는 ‘분묘개장의 소’를 통해 진행하여 종래에는 개장의 허가를 받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별도로 하겠으며, 이 컬럼을 개재하는 주요 원인이 무연고 묘의 개장 절차를 소개하겠습니다. 무연고 묘의 상태를 확인하여 보면 오랜시간 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평장의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즉 봉분이 이미 소실되어 외관상 분묘가 없는 상태로 관리가 되어 분묘가 없는 상태로 보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전에 봉문이 없는 상태로 관리가 되었다면 임야를 다른 지목으로 전환 시 토지의 평탄화 작업 중 소실되어 추후 그 분묘의 후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않는 한 문제없이 수십 년을 보내는 경우가 있으며, 평장의 상태로 관리가 되더라도 분묘에 설치된 비석 등을 발견하는 경우는 반드시 개장절차를 진행하여야 합니다. 무연고 묘라 할지라도 절차없이 개장을 진행할 경우 추후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일정의 절차를 거처 개장을 진행할 경우 행정적ㆍ법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니 반드시 절차에 따라 진행할 것을 당부드립니다. 무연고 묘를 개장허가 및 개장공고 하기 이전에 필요한 사항으로 첫 번째 연고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연고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근거를 남겨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의 증거없이 개장허가를 신청할 경우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불허가’ 처분을 내리니 무연고 묘를 판단되는 분묘에 표지판을 설치하거나, 묘지 근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곳에 표지판을 설치 후 위 표지판을 설치하여 사진찰영을 해두면 됩니다. 단지, 표지판만 설치할 경우 그 노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음에 무연고 묘에 관한 사항을 개장 예정일 3개월 전에 중앙 일간신문을 포함한 2개소 이상의 일간신문에 ①묘지 또는 분묘의 위치 및 장소, ②개장사유, 개장 후 안치장소 및 기간, ③공설묘지 또는 사설묘지의 설치자의 성명, 주소 및 연락방법, ④그 밖의 개장에 필요한 사항의 내용을 2회 이상 공고하고, 2차 공고는 첫 번째 공고일로부터 1개월이 지난 다음에 재공고 해야 합니다. 공고기간은 1차 공고의 경우 3개월 이상 및 2차 공고는 2개월 이상으로 하여 공고를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공고를 한 경우 개장을 신청하는 자는 지방자치단체 및 읍ㆍ면ㆍ동 사무소에 방문하셔서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제16조 및 동법 시행규칙 제6조내지 제7조에 근거한 신청서 및 구비서류를 제출할 경우 관할 지방자치단체의 심사기준에 따라 개장을 요구하는 신청자의 의도에 따라 개장허가를 득할 수 있으니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진짜고객을 찾기 위한 방법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진짜고객을 찾기 위한 방법은? 창업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준비했다면 사업계획을 검증하는 단계가 필요한데 그과정이 창업과정이다. 사업에 필요한 단 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업을 잘되기 위해서는 우수한제품, 우수한 기술, 멋진 사업계획, 누가봐도 좋은 비전, 멋진 팀, 역량있는 경영자, 투자자금, 경쟁우위 등 모두 중요하지만 사업에 필요한 단 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은 '돈을 지불하는 실고객' 이다. 사업이 괜찮은 동시에 지속 가능하려면 적자를 면하는 수준을 넘어 비교적 단기간에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충분한 고객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초기기업으로 자원이 부족한 기업이라면 최소 투입으로 최대 효과를 낳는 효율성을 지향해야 한다. 창업자의 첫 번째 과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제품설계, 개발자고용, 영업전문가 영입이 아니라,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은 철저하게 고객지향적인 관점에서 미충족 수요를 발견하고 그 기반위에 사업을 설계하는 일이다. 창업자에게 '모두가 내고객' 은 함정이다. 모든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것은 허황된 꿈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창업자에게 시장점유율 확대는 자원이 풍부한 대기업이나 넘볼 수 있는 목표다. 창업기업에게는 그럴 여유자금이 없다. 창업자는 시장 지배가 가능한 시장을 찾아 시장과 고객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그곳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적용하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시장을 찾아야 한다. 세분화된 여러시장 중 매력적인 시장기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표고객의 지불능력이 충분한가? 고객에게 돈이 없다면 지속적인 현금 창출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전해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다. 둘째, 목표고객이 판매조직에 쉽게 접근할 방법이 있는가? 기업설립 초기에는 품질 개선 주기를 짧게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반복해야 하므로 중개인에게 의존하기 보다는 고객과 직접 거래하는 편이 낫다. 셋째, 목표고객이 구매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사한 대체품이 있을 때 내가 만든 제품을 선택할까? 이미 익숙한 제품에 그냥 만족하지 않을까? 대다수 고객은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넷째, 협력업체와 함께 완제품을 당장 출시하는 것이 가능한가?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해결책을 내놓으려면 다른 제조업체 혹은 판매업체와 협력해야 한다. 다섯째, 난공불락의 경쟁자가 버티고 있는가? 경쟁자는 어느 시장에나 존재한다. 고객의 관점에서 경쟁자는 얼마나 강력한지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고객의 눈에 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한다. 여섯째, 세분시장의 성공을 바탕으로 다른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가? 거점시장을 장악한 다음 기존 제품이나 영업전략을 약간 수정해 인접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까? 체크해야 한다. 일곱째, 창업 팀의 가치관, 열정, 목표에 부합하는 시장인가? 여러 가지 다른 기준을 앞세우느라 창업가의 개인적인 목표를 밀어내서는 안된다. 매력적인 시장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시장조사를 해야 한다. 시장에서 수집해야 할 정보는 다음과 같다. 1) 최종소비자 : 제품을 사용할 사람은 누구인가? 회사의 운명을 함께할 존재로 이들이 시장 진출의 성패를 좌우한다. 2) 용도 : 최종사용자는 어떤 목적으로 제품을 구입할까? 3) 혜택 : 최종사용자가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 제품 특징이나 기능이 아니라 고객이 궁극적으로 얻는 이득을 구체화 해야 한다. 시간단축일까?, 아니면 비용절감? 4) 선도고객 : 사고리더십(thought leadership)을 발휘해 제품구매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고객은 누구인가? 5) 시장특성 : 기술의 도입을 장려하는 시장인가?, 아니면 가로막는 시장인가? 6) 파트너 :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어떤 기업과 연합해야 하는가? 7) 시장규모 : 시장침투에 성공한다고 가정했을 때 고객수요는 얼마나 될까? 8) 경쟁자 : 실제로 유사한 또는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제품이 존재하는가? 9) 필수보완재 : 다른 제품이 있어야 고객 수요를 완벽히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제조업체의 제품과 묶어서 판매하는 전략을 고려해야 한다. 진짜고객을 찾기 위해서는 목표시장과 직접 만나 양질의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매력적인 시장을 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한다. 인터넷 검색이나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그런 방식으로는 완벽한 시장 기회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정보과잉으로 '분석마비상태' 에 빠질 수도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임대인의 사용책임 의무[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임대인의 사용책임 의무 이상 기온의 현상으로 인해 국내ㆍ외에서 많은 비로 인해 수조의 경제적 상실 및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을 자연재해로 인해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의 소식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전 많은 장마로 인해 우리나라도 연일 뉴스에서 OO지역 침수 및 충청도 OO지하도 익수사고 등 물로 인한 피해가 매일 새롭게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많은 비로 인해 뉴스에서는 보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임대인과 임차인의 분쟁에도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분쟁의 원인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누수피해가 주로 발생되고 있고, 외부에서 유입된 누수로 인해 종래에는 임차인이 수일에서 수개월까지 임차건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항이 발생되어 임차인과 임대인의 분쟁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잘 살고 있는 주택 및 상가에서 다량이 물이 유입되어 주택같은 경우는 생활용품 및 옷가지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피해가 발생된다면 임차인은 그 원인이 건물에 있는 것으로 추정 및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피해를 집주인인 임대인에게 말을 해봐도 임대인은 건물에 누수가 없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통상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원인을 누수전문가를 통해서 건물 누수가 맞다고 판단을 한다고 하더라도 임차인에게 발생된 피해를 “알아서 하라” 식의 자세만을 고수하여 결국에는 ‘임대차분쟁조정심의위원회’나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통상적인 임대인들은 단시간에 발생된 누수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이 없다”라고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누수가 단시간이든 장시간이든 임차인의 물놀이 등의 귀책사유가 없다면 법령 및 판례에서는 임대인의 책임에 무게를 두며, 수선의무의 다하지 않는 임대인에게 그 손해배상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임대인은 임차인이 목적물인 주택을 사용, 수익할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라고 '민법' 제618조에 규정하고 있으며, 동법 제623조에서는 “임대차 계약에 있어서 임대인은 목적물을 계약 존속 중 그 사용ㆍ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라고 규정하여 임대인의 사용수익 의무를 법률로 기속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판례에서도 “임차인이 계약에 의하여 정해진 목적에 따라 사용ㆍ수익할 수 없는 상태로 될 정도의 것이라면 임대인에게 수선의무를 부과한다”라고 판실 할 정도로 임대인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2010다89876, 2010다89883, 2011다107405 판결 등) 현재 당장 임차건물에서 살아갈 임차인 입장에서는 집주인인 임대인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여 임대인이 나가라고 할 까봐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은데, 임차건물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건물 및 동산 피해가 발생한 경우는 어떻게 하든 그 손해를 줄이기 위해 종래에는 '항고쟁송'의 사건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필자는 보았습니다. 임대차계약 관계가 종료된 후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필자는 피해가 발생될 당시 해야만 조금이나마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신빙성으로 인해 피해를 줄 일 수 있다고 판단되니, 누수로 인해 피해가 발생되었다면 피해의 정도, 형상 등의 자료를 확보하시어 임대인과 전달을 하신다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점을 당부 드립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 또 하나의 삶의 과제 ‘결혼’ 1782년(26살) 7월 16일에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로서 빈 생활을 시작하고, 빈(Wien) 궁정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에서 3막 희극 징슈필 ‘후궁 탈출(K.384)’ 초연을 마친 뒤, 결혼이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삶의 과제가 앞으로 다가왔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이미 불화가 깊어진 아버지와의 관계는 ‘후궁 탈출’의 성공으로 화해의 끈이 아직은 이어져 있었지만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반드시 허락을 받고자하는 아들의 관계는 여전히 팽팽한 평행선이었다. 작년(1781년) 5월, 궁에서 쫓겨났지만 빈에 남기로 한 모차르트는 갈 곳이 없었고, 프리돌린 베버가 사망한 후 빈으로 이사 온 베버 가족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체칠리아(베버의 미망인, 콘스탄체의 어머니) 부인은 빈에서 숙박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 때 사랑했던 알로이지아는 이미 출세하여 큰 부자가 된 요제프 랑게(희극 배우)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모차르트의 뇌리에 항상 따뜻한 보금자리로 남아있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의 집 2층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시만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7월 13일에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장기적으로 기거하기로 작정한 뜻을 전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체칠리아 부인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콘스탄체는 외모와 가창력이 다른 자매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모차르트에게 매우 다정했다. 평범한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 베버 가족에 대한 여러 얘기와 그 집 셋째 딸 콘스탄체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잘츠부르크까지 전해졌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반대는 레오폴트에 이어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까지 태도를 굳히면서 점차 격렬해졌다. 최고의 음악가로 성공해야할 모차르트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도 포함시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들려오는 여러 소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과 걱정으로 가득 찬 조언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숙집만큼은 꼭 바꾸라고 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근심을 덜기 위해 7월 25일자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모차르트의 변명 “설령 지금 결혼해서 운이 트인다 하더라도 제 머리는 다른 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도저히 여자에게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내리신 재능은 한 여자 때문에 망쳐버린다거나 젊은 날을 하는 일 없이 지낸다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생활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이 마당에 스스로를 비참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현재로서는 그런 것은 제게 재앙입니다..... 소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깨끗한 방은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처럼 편리한 곳, 이처럼 인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은 그리 쉽사리..... 하지만 그뿐, 그밖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농담을 나눈 사람과 모두 결혼해야 한다면, 바로 200명의 아내를 갖게 되겠죠” 그리고는 항상 편지의 말미에 작곡과 연주 등 음악에 관한 구상과 아버지의 조언을 구하는 내용으로 글을 마쳤다. 콘스타체에게 청혼 1782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에게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체칠리아 부인은 생활의 협상에 노련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모차르트의 재능은 높이 샀지만 수입이 없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터였다. 만24살이 넘어야 성년이 되는데 콘스탄체는 아직 19살이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걱정이라며 콘스탄체의 집안 후견인인 요한 폰 토르바르트를 불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궁정 관료로 궁정극장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논하여 작성한 문서를 모차르트에게 보였다. 3년 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해마다 300플로린(약 1500만원: 18세기 통화환산 기준)을 위약금으로 물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계약조건은 당시 빈에서 성행하는 일이었다. 18세기 말의 유럽사회는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이상과 지성을 중시하고 사회적 합리를 추구하는 듯 한 냉정함이 세련된 행동으로 치부되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체칠리아 부인은 이미 알로이지아를 요제프 랑게에게 시집보낼 때 연간 900플로린이라는 거금을 받는 계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었다. 후견인과 체칠리아 부인은 증서를 쓰지 않으면 딸과 절대 교제를 할 수 없으니 문서로 확증해야 한다며 모차르트에게 서명을 종용했다. 이를 보고 있던 콘스탄체는 화가나 울면서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리고는 어머니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모차르트와 함께 집을 나와 버렸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후원자인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에게 콘스탄체를 데리고 가서 숙식을 부탁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계산되지 않은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랑과 철없는 듯 한 행동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청춘들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비록 노년이 되어도 남아있는 열정이다.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었다. 단테,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3대 시성(詩聖)으로 불리게 되는 무명작가 시절의 청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06)가 12주 동안 몰입하여 써내려간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럽 전역에 번역되어 베르테르는 젊은이의 열병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푸른 연미복에다 노란조끼를 입는 것이 유행했다. 연기처럼 퍼져나간 주인공의 좌절과 고독은 실연당한 남자들에게 전염되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어났다. 한 때는 책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던 이 현상은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라는 학술용어까지 만들어지며 현대에 까지 이어져 온다. 18세기 말, 유럽의 젊은이들은 왜 그토록 베르테르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당시 유럽에 번져나간 계몽주의는 신분 상승과 물질과 명예에 대한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이해타산에 가치를 크게 두는 사람도 있지만 실익이 없어 보이는 측은지심이나 보이지 않는 내면적 평안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 더 많다. 베르테르 효과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젊은이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비물질 비욕망을 통한 마음의 평화도 자극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도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진 않지만 이 베르테르 효과의 영향으로 두 사람이 공유한 순수한 마음의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괴테와 모차르트는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동 시대에 같은 유럽 내에서 살았다. 모차르트가 7살 쯤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을 할 때 14살의 괴테가 모차르트를 보았고, 훗날 그의 제자 요한 페터에커만에게 당시 어린 모차르트는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를 동경한 공통점이 있었다. 괴테보다 일곱 살이 적은 모차르트는 괴테보다 17년 먼저 1769년(13살)에 이탈리아를 1년 4개월 동안 방문했고, 괴테는 37살이 되던 해인 1786년(모차르트 30살)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괴테는 모차르트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 감독 시절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했다. 파우스트가 완간되기 전에 1790년에 단편 파우스트를 발간하면서, 파우스트가 모두 완성되어 오페라를 만든다면 오직 모차르트만이 작곡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