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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⑲ 잘츠부르크-세 번째 새로운 시작

입력 2023.04.24 11:29
수정 2023.04.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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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송 문화예술학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슈라텐바흐 대주교 (1698-1771)와 콜로레도 대주교 (1732~1812).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슈라텐바흐 대주교 (1698-1771)와 콜로레도 대주교 (1732~1812)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⑲ 잘츠부르크-세 번째 새로운 시작 

     

    1779년(23살), 15개월 만의 가족 상봉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히에로니무스 그라프 폰 콜로레도 Hieronymus Graf von Colloredo 1732~1812)는 모차르트가 외부의 공연 요청이 있으면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귀향과 복직을 허락했다. 레오폴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칼 테오도르 선제후(Karl Theodor 1724~1799)의 편지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1779년 1월 16일, 모차르트는 15개월 만에 가족들과 다시 만났다. 어렵게 재회한 가족들의 만남은 기뻤지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는 메울 길이 없었다.

     

    다음날인 1월 17일 콜로라도 대주교를 알현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그 전보다 보수도 더 늘어나고 대우도 좋아졌다. 그러나 궁정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만만하지 않았다. 외부의 입김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대주교는 반항아로 성장해서 돌아온 모차르트에게 거리를 두었다. 지위도 악장이 아니라 궁정과 성당에서 필요한 새로운 음악을 의무적으로 작곡해서 제출해야 하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였다.

     

    잘츠부르크의 두 대주교

    모차르트 생애 동안 잘츠부르크를 통치한 대주교는 두 사람이다. 1753년부터 1771년까지 18년 간은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Sigismund von Schrattenbach (1698~1771) 대주교가 다스렸고, 그 다음해에 콜로레도 대주교가 부임했다. 모차르트 가족을 대하는 두 대주교의 배려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슈라텐바흐 대주교는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모차르트 부자의 음악 여행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1762년 첫 연주여행을 출발할 때부터 대주교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월급을 전액 지급하고 600플로린의 여행 경비까지 지원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여 모차르트 가족의 음악여행을 잘츠부르크의 명예를 드높이는 홍보사절로 인정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달랐다. 음악가는 귀족에게 예속된 하인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그로서는 모차르트 가족에게 자유를 주려고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를 늘 가까이 붙들어 두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도 있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걸핏하면 연주여행으로 다른 나라로 떠나는 모차르트 부자의 눈치 없는 행동은 당연히 대주교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서양음악사에서 모차르트를 핍박하고 괴롭힌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음악을 좋아하고 궁정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만큼 음악적 소양도 지니고 있었다. 계몽군주로 평가되는 그는 잘츠부르크의 여러 제도를 개혁하려고 추진하였다. 교회의 미신적 관습과 순례를 금지하고 전례 절차를 간소화하여 성당 장식에도 많은 제약을 만들고 긴축재정으로 경제적 안정을 추진하였으나 결국은 봉건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범위 안에서의 변화에 그치고 말았다.

     

    모차르트와 콜로레도 대주교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쁘지는 않았다. 모차르트는 슈라텐바흐 대주교 사제서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단막 오페라 '시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을 작곡하고 있었는데,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세상을 떠나고 1772년에 콜로레도 대주교가 취임하자 이 작품 중 오페라의 아리아와 합창 일부를 연주하고 헌정하여 대주교를 기쁘게 한 기록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과 작곡 전념의 시간

    고향에서 아버지와 다시 힘을 모은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옛날의 긴밀했던 관계를 회복했다. 그리고 의무적인 궁정에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작곡에 전념했다. 이 세 번째 잘츠부르크에서 시기는 그의 일생에서 최고의 역작들이 쏟아져 나온 중요한 18개월이었다. 그 동안의 연주여행에서 습득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지식과 작곡 스타일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잘츠부르크의 북동부에 자리한 마리아플라인(Maria Plain) 순례성당(1671년 건립)에서 성모대관식 미사곡을 작곡하면서 성모신심을 키워나가며 독일 오페라 징슈필 '차이데' 작곡에 착수했다. 이 곡은 일종의 구원 오페라(Rescue Opera)로 노예인 고츠마를 여주인공 차이데가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죽은 뒤인 1799년에 세상에 공개되어 프랑크푸르트에서 1866년에 초연되었다.

     

    모차르트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 여신과 그의 처 오시리스, 아들 호루스 등에도 관심을 갖고, 수많은 혁신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향곡 G장조 K.318, B장조 K.319, C장조 K.338과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b 장조', '포스트호른 세레나데 Posthorn-Serenade K.320' 그리고 교회음악 C장조 미사곡 '대관식 미사 Krönungsmesse' 등을 써 나갔다.

     

    모차르트의 자의식과 존재론적 고민

    모차르트가 3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긴 음악은 626 곡이다. 이는 정식 번호가 붙어있는 작품만 그렇다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 숫자의 3배수까지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무리한 계산이 아니다. 모차르트의 악보는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뒤 보여 준 작곡의 속도나 작품의 숫자를 보면 오직 모차르트만이 가능한 엄청난 생산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파리에서 돌아온 23살의 모차르트는 ‘질풍노도’와 자유 시민의 분위기를 맛보았고 인기인의 달콤함과 언제든지 돌아서버리는 청중의 속성까지 이미 경험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비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자의식과 현실의 사이에는 큰 간극과 차이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오랜 세월동안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천재성을 인정받고 많은 실력과 경험을 쌓고 돌아왔지만 잘츠부르크에서는 평범한 궁정 음악가로서 주문생산자의 상황이 되어 있었다.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어(Idomeneo)의 한 장면.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어(Idomeneo)의 한 장면

     

    행복의 신호탄 '이도메네오Idomeneo'

    그러던 중에 뮌헨에서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칼 테오도르 선제후가 보낸 작곡 의뢰였다. 1778년은 만하힘의 카를 테오도르가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의 상속인으로 취임하는 해였다. 이에 맞추어 뮌헨에서의 사육제를 위한 대형 오페라 '이도메네오 Idomeneo'에 곡을 붙여 달라는 편지였다. 모차르트에게는 행복의 신호탄이 될 행운의 기회였다. 칼 테오도르 선제후는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많은 지원을 하는 것으로 당시에도 명망이 높았다. 사육제는 부활절 전 40일 동안의 사순절 기간에 앞서 3일에서 한 주일간 즐기는 축제를 말한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