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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㉑ 오페라 '이도메네오 (Idomeneo) K.366' 의 초연과 대성공

입력 2023.05.22 08:03
수정 2023.05.2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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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송 문화예술학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일괄편집_임송1.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 오페라'이도메네오(Idomeneo)' 제3막 해피앤딩의 피날레 장면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파리에서의 고통으로 인한 모차르트의 내적 성장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 전 파리에서 보낸 1년 반은 청년 모차르트에게는 매우 어려운 인생 공부 시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1778년은 생애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의 해였다. 그것은 타지에서 맞게 된 어머니의 죽음과 그 충격과 함께 시작된 최초의 자립생활이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막연히 바라는 것이 독립된 삶이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모차르트에게도 이 독립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든 출발이었다.

     

    그의 일생에 있어 제3차 파리여행(1777년~1778) 이전까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주고 그에 상응한 대가(代價)와 찬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타지에서 혼자가 된 모차르트는 처음으로 파리의 지배 계급에게서 강요와 무시를 느꼈다. 레슨비와 작곡료를 주지 않고 모른척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여러 번 체험했다.

     

    모차르트는 받아야 할 대우는 자신의 권리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깊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자존심의 꿈틀거림도 의식할 수 있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상류층에 대해 반항의 의지가 생겨났다. 제도권 내에서의 성공과 신분상승을 계획해 온 아버지였다면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들과 그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모두 거부하고자 하는 자의식이 커져갔다.

     

    콜로레도 대주교의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 K.366' 작곡 공식 하명

    성장통을 앓고 돌아 온 모차르트는 1779년 1월 16일부터 잘츠부르크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성실히 근무하였다.

     

    특히, 종교음악 작곡에 열중하였다. 1780년(24살) 11월 5일, 콜로라도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직접 불러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요청한 오페라 작곡 의뢰에 대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하명(下命)했다.

     

    대주교의 입장에서 선제후의 요청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행사를 위한 작곡은 선물을 준비하는 잘츠부르크 측에서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면 요청을 승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승낙한 경우에도 대본의 수정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으나 선제후가 직접 작곡가를 지정하고 자신의 취향을 가미한 새로운 요소를 기대하며 대본 책임자와 주제까지 결정하여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요구에는 잘츠부르크에서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바이에른 궁정에 대한 호의가 없는 것으로 오해를 사는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도 있으므로 드러나게 공적 태도를 표방하였다. “바이에른의 칼 테오도르 선제후께서 그대에게 내년 사육제 기간에 공연할 오페라 작곡을 요청해 왔다. 영광스러운 일이다. 6주 간의 휴가를 부여하니, 궁정의 바레스코 신부가 맡아 쓴 대본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작곡하여 선제후께 올리고 돌아오도록 하라” 고 명했다.

     

    잠바티스타 바레스코(Giamvattista Varesco 1735~1805)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775년부터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 '카이로의 거위', '양치기 왕' 등의 대본을 썼기 때문에 모차르트와는 서로 잘 아는 우호적인 관계였다.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가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로 성공한 첫 번째 작품이 되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오페라 부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정가극(正歌劇) 또는 멜로드라마 오페라라고 번역 한다. 선제후가 요구한 오페라의 주제는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크레타 왕이 아들을 희생해야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처지가 되는 비극이지만 극적으로 반전하는 해피엔딩 오페라였다.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 K.366'의 줄거리

    그리스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는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난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도착 후 처음 만나는 생명체를 바치겠다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맹세한다. 그러나 이도메네오는 제일 먼저 자신의 아들인 이다만테를 만나게 된다. 이도메네오는 아들에게 아르고스로 도망갈 것을 명하고, 화가 난 포세이돈은 폭풍우를 일으켜 크레타를 폐허로 만들기 위해 괴물을 보낸다.

     

    아들 이다만테는 포세이돈이 보낸 괴물을 처치했지만 아버지가 맹세를 지키도록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자하여 이도메네오가 도끼를 든다. 이때 이다만테를 사랑하는 트로이 왕의 딸 일리아가 트로이 사람인 자신을 대신 죽이라고 이도메네오를 말린다. 이에 사랑의 힘으로 포세이돈의 분노가 풀린다. 이다만테는 일리아와 결혼하여 왕위에 오른다.

     

    아!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리

    6주 간의 특별휴가를 얻은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났다. 이 떠남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음을 모차르트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의 인생이 1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뮌헨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1781년 3월 16일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잠자는 시간도 잊은 채 이도메네오 작곡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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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송 박사 사진제공 - 모차르트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가 초연되었던 퀴빌리에 극장(Cuvilliés Theatre)

     

    -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뮌헨에서, 1781년 1월 3일

    ......

    너무나 좋아하는 아버지!

    저는 머리와 양손은 온통 이도메네오 제3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저 스스로가 제3막으로 변신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3막 하나만 갖고도 오페라 전체 이상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아주 재미있는 장면 아닌 곳이 하나도 없거든요. 지하(地下) 목소리의 반주는 5성, 그러니까 트롬본 셋과 발트호른 둘만 이용해서, 그것도 목소리가 나오는 곳과 똑같은 장소에 둡니다. 그때 오케스트라 전체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본 연습은 확실히 20일 열립니다. 그리고 초연은 22일입니다. (실제로는 29일에 열렸다) 아버지와 누나는 각각 검은 옷 한 벌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평상복을 한 벌, 아무런 예의도 필요 없고, 친한 친구들에게 말고는 가지 않는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리고 검은 옷이 어느 정도 유용합니다. 하지만 만약 원하신다면, 무도회와 가장 발표회를 위한 옷 한 벌 ......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뮌헨에서, 1781년 1월 18일

     

    …… 

    감사하게도, 마침내 해냈습니다. 이제는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이도메네오 제3막 시연(試演)은 멋지게 치러졌습니다. 모두들, 그 앞의 2막보다 훨씬 잘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막은 가사가 너무 깁니다. 따라서 음악도……

     

    그리고 이다만테의 아리아 ‘아니,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를 생략합니다. 어쨌든 여기에 어울리지 않거든요. 그러나 그 곡을 음악으로 들은 사람들은 생략한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쉬고 맙니다. 그리고 라프가 부를 마지막 아리아도요. 그 바람에 모두 한층 더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화가 변해 복이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탁(神託) 역시 너무나 길어서 좀 줄여놓았습니다. 바레스코에게 이런 이야기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쓴 게 통째로 그대로 인쇄되니까요. ……

     

    열정을 쏟은 만큼 공연준비는 예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오페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의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했다. 성악가들의 특성을 살리고자 곡을 고치는 작업도 계속 늘어났다. 초연은 1월 29일에 열렸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6주로 정했던 특별휴가 기간이 12주 정도로 초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갈등이 표출되었다.

     

    콜로라도 대주교는 거친 욕설로 모차르트를 꾸짖었다. 휴가기간을 과도하게 늘려서 복귀하지 않는 모차르트의 행동을 지시를 따르지 않은 항명과 불복종으로 판단하였다.

     

    모차르트는 예술적 완성을 위한 고군분투와 불가피한 기간초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주교의 분노를 멸시와 핍박으로 받아들였다. 계속된 불통과 대립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