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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㊴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

입력 2024.02.26 07:56
수정 2024.02.2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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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일괄편집_image01.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빈 음악가협회의 여러 콘서트가 열렸던 옛 부르크극장(Burgtheater) 아우구스트 게라슈(August Gerasch, 1822~1908)가 그린 19세기 상상화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아버지를 울린 모차르트 음악회

    아버지 레오폴트가 빈(Wien)에 도착해 모차르트의 집에 머물며 지낸지 한 달이 지났다. 레오폴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빈 음악가협회'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와 아카데미가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성공을 이루었던 정점의 시기였다. 1785년(29살) 3월 10일에도 빈의 부르크극장(Burgtheater)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모차르트는 이 연주회를 아버지와의 불화를 종식하는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연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K.467)를 준비했다.

     

    화려하고 당당하게 행진곡 풍으로 시작하는 1악장은 목관과 금관이 팀파니와 어우러지며 피아노와 함께 빠르고 장엄하게 변화무쌍한 화음을 전개한다. 2악장은 아련하게 가슴에 스미는 애틋한 슬픔, 3악장은 밝고 경쾌한 수다스러운 개구쟁이를 관현악이 포근하게 받아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21번 C장조를 ‘미소와 슬픔의 2중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곡의 2악장 안단테(Andante)에서 독주자 모차르트의 왼손이 연주한 셋잇단음표는 아버지가 작곡한 피아노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작품에 취해 기쁨을 느끼던 레오폴트는 자신이 작곡한 소나타의 리듬이 재현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의 아름다운 2악장 안단테는 지금도 많은 영화의 배경음악이나 광고음악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영화 007시리즈 중에서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스페인 영화'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년)의 주제음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엘비라 마디간에서 안단테의 아름다움은 당시 17살의 발레리나를 전공한 배우 피아 디거마크(Pia Degermark, 1949~)를 단숨에 세계의 인기 스타로 만들어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1악장

    https://youtu.be/CLTs3Y5FV5A?si=y6Dsd9o2GDaRSA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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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2악장

    https://youtu.be/RU9dRIE7rII?si=IKDulJ_oU23A6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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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3악장

    https://youtu.be/L5ulYOVgZqY?si=lMzO-cXF5eDENt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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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

    모차르트에게 자주 연주 기회를 만들어 준 ‘빈 음악가협회’는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 1729~1774)이 주도하여 1771년에 설립한 빈 음악가들을 위한 자선 단체였다.

     

    가스만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slio Salieri, 1750~1825)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바로크 시대와 고전 시대 사이의 전환기에 활동했던 독일어권 보헤미안 오페라 작곡가였다.

     

    협회의 목적은 '은퇴한 음악가와 그 가족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협회는 1772년부터 주요 고전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대규모 연주자들과 함께 일련의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다.

     

    '과부와 고아 지원을 위한 빈 통쿤스틀러 협회'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협회는 1811년에 음악애호가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설립된 때까지 빈에서 콘서트를 제공하는 유일한 민간 조직이었다.

     

    이 기구가 지속적으로 존속하며 빈 악파와 고전음악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막중한 버팀목이 된 과정에는 교회의 지원과 음악가들의 고용주였던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1741년에 부르크극장(궁정극장)을 설립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1771년 2월 23일에 협회 창립을 승인하는 법령을 반포하면서 협회 기금으로 500두카트(18세기 환율기준 약 1억 원)를 최초로 기부했고 그 뒤로 귀족들의 후원이 이어졌다.

     

    고전음악시대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역사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자료를 남긴 카를 폰 진첸도르프 백작(Count Karl von Zinzendorf, 1739~1813)은 당시 ‘음악가협회’의 자선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귀족들의 의무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작센-오스트리아의 공무원에서 트리에스테(Trieste) 주지사를 포함한 다양한 직위로 오스트리아 정부에 봉사했으며 합스부르크 궁정 고위직까지 오르는 66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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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박사 자료제공 - 빈 음악가협회를 설립한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smann, 1729~1774) 요한 발처(Johann Balzer, 1738~1799)의 1775년 조각

     

    빈 음악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었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하여 협회에 처음으로 등장했었던 1781년 4월 1일과 3일의 콘서트에는 바이올린 40명, 비올라 8명, 첼로 9명, 콘트라베이스 11명, 플루트 2명, 오보에 7명, 바순 6명, 잉글리시 호른 2명, 호른 4명, 트럼펫 2명, 팀파니스트 1명 등 총 92명의 단원과 합창단 54명으로 총 146명의 연주자가 고용되었다.

     

    1781년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을 알리고 협회의 콘서트에서 그의 교향곡이 얼마나 잘 연주되었는지에 대해 기쁨을 표현했다.

     

    빈 음악가협회에서는 회원들이 사망할 경우 그 유족들에게 일정한 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당시에 고용에 대한 불안과 적은 수입에 고민이 많았던 모차르트는 협회 가입을 희망하며 4년여를 보내던 차였다.

     

    모차르트는 2월 11일과 3월 15일에 두 번에 걸쳐 협회 가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다른 조건은 충족되었지만 출생증명서가 제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청 절차가 지연되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멀리 떨어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기에 출생증명서를 제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불편한 상황으로 기회를 살피느라 계속 지연되었다.

     

    결국 두 번째의 약속까지 지키지 못하고 8월 24일에 또다시 연기 통보를 받았다. 모차르트의 빈 음악가협회 가입 지연은 훗날 1791년에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많은 빚과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맡게 된 아내가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나중에 아내 콘스탄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용기 있는 사업가로 매진해 남편의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협회에 가입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모차르트 삶의 일면이었다.

     

    유럽 음악계의 모범이 된 빈 음악가협회

    음악사의 관점에서 볼 때 협회의 가장 큰 의의는 사회적 약자의 후생 지원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는 오늘날까지도 호평을 받고 있는 음악 작품을 초연하거나 보급하는 데 중요한 소임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빈 음악가협회는 오스트리아 제국뿐만 아니라 베를린(1801)과 상트페테르부르크(1802)에서도 유사한 조직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협회의 공연은 부활절 시간에 두 번, 크리스마스 직전에 두 번 등 수년에 걸쳐 상당히 일관되게 유지된 일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초창기에는 조직이 상당히 모험적이어서 새로운 작품이나 최신 작품을 공연하였다.

     

    1862년에는 하이든의 이름을 앞에 넣어서 '하이든: 비엔나의 과부 및 고아 돌보기를 위한 음악가 협회'로 불렸다.

     

    이 협회는 1939년 3월 9일 독일 국가 사회주의 정부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이를 폐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곳에서 공개 콘서트가 번창하고 협회 자체 프로그램이 보수적으로 변화하면서 협회의 역사적 중요성은 줄어들었고 음악 학자들의 연구 분야에서도 조직에 대한 언급은 점차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