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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⑩ 매심재 (每心齋)와 여유당 (與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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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⑩ 매심재 (每心齋)와 여유당 (與猶堂)

임 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손암 정약전.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손암 정약전(1758~1816)

 

[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1800년 8월 18일 정조대왕(正祖, 1752~1800)이 승하했다. 정조는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두 형제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무엇보다 두 형제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고 인정해 준 임금이었다.

 

다산 시문집 제15권 ‘선중씨(先仲氏)의 묘지명’ 중에 손암과 정조의 일화들이 적혀 있다. 글을 살펴보면, 이 벽(李檗, 1754~1786)을 통해 서학(西學)에 경도된 손암은 일찍이 진사가 되었지만 “대과(大科)는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후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며 증광별시에 응시해 급제하고 규장각에 소속되었다. 이어 “형이 아우 밑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정조의 배려와 등용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또 정조는 손암에게 “약전의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라고 치하하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집필을 직접 맡기는 옅지 않은 총애가 있었다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대왕이 승하하기 1년 전인 1799년 1월 18일(정조 23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영의정까지 지냈던 채제공이 사망하였다.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채제공은 노론벽파로부터 약전과 약용 두 형제를 보호하는 버팀목이었다. 그해 2월에 정조는 다산 정약용을 황주에서 청나라 사신들을 영접하는 황주 영위사(迎慰使)로 임명하고 바로 임시 호조참판으로 높였다. 4월에는 중앙관직인 병조참지를 제수했다. 다산이 곡산부사를 그만둔 뒤 2년여 만에 조정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다산에 대한 신임은 엄청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동부승지가 되고 서울에 도착하자 정삼품 형조참의를 제수하고 어전에서 거의 매일 늦은 밤까지 독대하며 정사를 논했다.

 

정조대왕과 다산 정약전.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정조대왕과 다산 정약용, 출처: 화성저널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남인의 정적(政敵)이었던 노론벽파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장차 다산이 판서가 되고 정승이 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노론벽파는 1971년의 진산사건(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일)으로 촉발된 남인 공격의 일환으로 천주교 신자인 다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였다. 천주교 탄압을 막아주던 채제공이 죽고 난 뒤였기에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노론벽파는 다산 대신 형 약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극렬히 간언(諫言)했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벼슬자리에 있지도 않은 형을 탄핵하는 행태에 분노한 다산은 결국 무고에 대해 이를 반박하는 자명소(자기의 죄가 없음을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를 정조에게 바치고 약전과 함께 고향 마재로 내려갔다. 정조도 마지못해 이를 허락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약용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고, 약전은 자신의 서재(書齋) 이름을 매심재(每心齋)라 하여 지내며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 된 신유년(辛酉年)의 변고가 있기 전까지 학문에 정진했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다’는 뜻이고, ‘유猶’는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의 뜻이다.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이웃을 두려워 하듯이 매사에 조심한다는 의미다. 매심재는 매양 매(每), 마음 심(心), 집 재(齋)인데 뉘우칠 회(悔)자를 파자(破字) 하여 매양 매(每), 마음 심(心)으로 나눈 것이다. 매심은 곧 뉘우친다는 뜻이 된다. 기발한 발상이다. 파자는 한자나 한글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하여 뜻을 만들어내는 절묘한 문자 문화의 소산이다.

 

정약전은 서실의 이름을 ‘매심재’라 짓고 동생 정약용에게 ‘매심재’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청했다. 이 ‘매심재기’를 읽어 보면 두 형제의 사상에 서학이 끼친 영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정약전은 ‘매심’ 즉 뉘우침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흑산도에서의 삶을 보면 섬에 사는 사람들과도 반상(班常)의 신분에 구애됨 없이 아주 절친하게 지냈다. 천주교 조선교구 목포 지역 초대 신부였던 드예 신부의 사목보고서에도 그가 죽은 지 80년이 훨씬 지난 후까지 그의 겸손과 정결함에 대한 존경과 칭찬이 자자하여 유배의 삶 속에서도 영성적 삶의 모습을 지켜갔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음은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편에 수록된 매심재기 전문(全文)이다.

 

여유당전서.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여유당전서 중 매심재기, 출처: blog.naver.com

 

매심재기(每心齋記)

- 둘째 형님이 초천(苕川)으로 돌아가서 그의 재실(齋室)을 ‘매심(每心)’이라 이름하고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매심(每心)이라는 것은 회(悔)인데,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 뉘우침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재실을 이렇게 이름 붙였으니, 네가 기를 써라.”

나는 그윽이 듣건대, 사람은 형기(形氣 형상과 기운 또는 신체와 정신)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과오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성인(聖人)과 광인(狂人 뜻이 커서 상규(常規)에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의 구별은 오로지 뉘우치느냐 뉘우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윤(伊尹)의 말에, “광인이라도 생각하면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된다.”고 했으니, 생각한다는 것은 뉘우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비록 주공(周公)과 같이 훌륭한 재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교만하고 인색하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인색하다는 것은 뉘우치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또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몇 해만 더 살아서 끝내 《주역(周易)》을 읽게 된다면 거의 큰 과오는 없을 것이다.”하였다.

 

대저 주공과 공자 같은 성인은 의당 뉘우칠 만한 과오가 없을 것인데도 그들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범인(凡人)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주역》은 허물을 뉘우치는[悔過] 책이다. 성인은 우환(憂患)이 있을 때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고 오로지 과오를 스스로 뉘우친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갇혀서 《주역》을 부연하였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에서 궁액(窮厄)을 당하면서 십익(十翼)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64괘(卦) 중에는 많은 것이 회(悔)와 인(吝)으로 괘상(卦象)을 세웠다. 이로 볼 때, 성인인들 어찌 뉘우침이 없었겠는가. 만약 성인이라고 해서 뉘우침이 없다면 성인이라는 자들은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니, 무엇 때문에 흠모할 것인가. 안자(顔子)를 인(仁)하다고 하는 이유는 같은 과오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고, 자로(子路)를 용감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듣기 좋아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뉘우친다면, 과오는 허물이 될 수 없다.

 

둘째 형님께서 재실을 그렇게 이름지은 것은 그 뜻이 어찌 크지 않은가. 그러나 뉘우침에도 도(道)가 있으니, 만약에 밥 한 그릇 먹을 만한 짧은 시간에 불끈 성을 냈다가 이윽고 마치 뜬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생각해 버린다면, 이것이 어찌 뉘우치는 도(道)이겠는가. 조그마한 과오가 있을 때는 고치고 나서 잊어버려도 괜찮으나, 큰 과오가 있을 때에는 하루라도 그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養心] 것은 마치 분뇨(糞尿)가 곡식의 싹을 키워주는 것과 같다. 분뇨는 썩은 오물로써 그 싹을 길러 좋은 곡식으로 만들고, 뉘우침은 죄과(罪過)로부터 덕성(德性)을 기르게 하니,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나는 뉘우쳐야 할 일이 둘째 형님에 비교하면 만 배나 더하니, 이것을 빌어다가 내 방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이 내 마음속에 있으니, 내 방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김도렴(역) 1984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hwa37111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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