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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⑧ 제2차 이탈리아 여행 – 성공 뒤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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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⑧ 제2차 이탈리아 여행 – 성공 뒤의 좌절

임 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 송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 고향 찰츠부르크.jpg
임 송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 고향 찰츠부르크

 

[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1771년 3월, 이탈리아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징슈필 '베툴리아의 해방(La Betulia liberata, K.118/74c)'을 작곡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차르트는 어느 날 오스트리아 궁정으로부터 중요한 연락을 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의 셋째 아들인 롬바르디아 총독 페르디난트 공작(1754~1806)과 모데나 공주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세레나타’ 작곡 의뢰였다.

 

결혼축제는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이 결혼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호화로운 축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축하 오페라(opera)와 세레나타(serenata)를 각각 최고의 작곡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페라 '루지에로(Il Ruggiero)'의 작곡은 대작곡가 하세(J. A. Hasse, 1699~1783)에게, 대본은 궁정시인 메타스타시오(P. Metastasio, 1698~1782)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는 모차르트와 계몽주의 시인 주세페 파리니(G. Parini, 1729~1799)에게 작곡과 대본을 주문했다.

 

교황청의 훈장을 받고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회원이 된 후 오스트리아 왕실의 정치적 명예가 걸린 결혼 축제에서 큰 역할까지 맡은 모차르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멋진 곡을 쓰려고 작정한 모차르트는 서둘러 작곡을 시작하려 하였지만 궁정의 검열 때문에 대본이 계속 늦어졌다. 날짜가 임박해지자 대본 없이 서곡만 완성한 채로 모차르트 부자는 8월 13일에 밀라노로 출발했다. 밀라노에 도착한 8월 21일에도 대본은 오지 않았고, 8월 29일이 되어서야 대본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미친 듯이 작곡에 몰두했다. 날이 갈수록 개인기가 충실해지는 모차르트에게 쫓기는 시간은 도리어 자신의 진가가 드러나는 기회가 될 뿐이었다. 작곡을 하면서 동시에 합창을 연습시키고 솔로 가수들이 도착할 때마다 신속하게 독창부분까지 완성하며 20여 일 만에 세레나타를 완성하였다. 리허설은 9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오페라와 세레나타는 같은 날에 공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세레나타는 오페라를 위한 보조적 역할로서 서막으로 연주되거나 궁정 연회의 마무리를 위해 저녁에 여흥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곡 모두 최고의 작곡가와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는 연주회였기에 국민들의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결혼식은 10월 15일이었다. 그래서 하세의 오페라 '루지에로'는 10월 16일에,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는 10월 17일에 각각 공연키로 결정되었다.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다음 날부터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전날에 공연한 하세의 오페라는 관객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 반면에 모차르트가 지휘하고 카스트라토 조반니 만추올리(G. Manzuoli, 1720~1782)가 주인공 아스카니오 역을 맡은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인기 카스트라토 만추올리와 명성이 드높아진 천재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관중이 몰려들었고 멋진 음악에 열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jpg
임 송박사 자료제공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eresia Walburge Amalia Christina) 여제

 

결혼 축제기간 동안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는 다섯 차례나 연주되었다. 공연에 참석하여 훌륭한 연주에 감탄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은 레오폴트에게 “여제께 청원하여 모차르트에게 빈 궁정 산하에 종신직 작곡가 자리를 하사 하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보다 두 살이 많은 대공은 어렸을 적에 모차르트가 쇤부룬에서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앞으로 곁에 두고 촉망받는 음악가의 장래를 보장해주려고 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레오폴트는 흥분하여 모차르트가 곧 직책을 맡게 될 것이고 궁정 작곡가 하세와의 경쟁에서도 이겼다고 소문을 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대공은 약속대로 모차르트에게 직책을 주고자 하는 청원 편지를 빈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께  보냈다. 1771년 12월 12일, 밀라노에 있는 대공에게 여제로부터 답장이 왔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깜짝 놀랐다. 여제가 아들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는 레오폴트 부자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견해와 결론이 적혀 있었다.


- 젊은 잘츠부르크인이 너를 섬기도록 해도 좋을지 의견을 물었지. 네가 왜 쓸모없는 작곡가를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게 즐거움을 준다면 굳이 막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직책을 주는 것만은 막고 싶구나. 그들은 거지처럼 세상을 떠돌아 다닌단다. 그런 사람들이 너를 섬긴다면 결국 황실의 품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게다가 그에겐 먹여 살릴 가족도 많다는구나. -

 

성공가도를 달리던 모차르트에게 좌절이 다가왔다.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실권자에 의해 앞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을 알지 못했다. 여제는 한 때 모차르트를 귀여워 하여 황태자의 예복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768년 빈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바보 아가씨'의 공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아플리지오의 횡포에 대해 레오폴트가 요제프 2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한 사건을 두고 여제가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인정했던 하세도 레오폴트에 대해서는 '그는 어디서나 불만을 드러내고 아들을 지나치게 우상화하여 자칫 아들을 망칠 수도 있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세는 여제가 어렸을 때부터 총애하던 신하이자 존경하는 음악가였다. 하세의 오페라 공연 실패도 여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여제의 변심은 레오폴트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며칠을 기다려도 페르디난트 대공으로부터 답신을 받지 못한 모차르트 부자는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12월 15일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좌절은 겹쳐지고 있었다. 고향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슈라텐바흐(Sigismund von Schrattenbach, 1698~1771) 대주교가 중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인 12월 16일,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서거했다.

 

모차르트 일가에게 호의적이었고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아들과의 장기간 유급여행을 허락해 주어 현재의 모차르트로 성공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도와준 후원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듬해 1772년 1월 27일, 모차르트는 16살이 되었다. 레오폴트는 토스카나 공국의 레오폴트2세에게도 모차르트의 거취를 청원했다. 레오폴트2세 대공도 마찬가지로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이었다. 1773년 2월, 토스카나 공국에서도 거절한다는 답변이 왔다.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의 궁정에 직책을 가질 기회는 없어진 것이었다.


'문명화 과정' 을 쓴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1990)는 모차르트 부자가 1762년부터 유럽 전 지역과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연주여행을 마친 1773년까지의 시기를 ‘모차르트의 수련기간’으로 구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천부적 자질로 유명해진 신동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힘들고 거친 수련의 시간을 거쳐서 노력 끝에 쟁취한 음악성을 갖춘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기자 qnowstar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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