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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⑰ 제2차 파리여행7 (어머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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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⑰ 제2차 파리여행7 (어머니의 죽음)

임송 문화예술학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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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송 박사 자료제공 -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Friedrich Melchior, Baron von Grimm 1723~1807)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모자(母子) 파리에 도착

1778년(22살) 3월 23일 월요일 오후 4시경에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파리에 도착했다. 만하임을 출발하여 9일이 소요되었다.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파리를 향해 떠난 지 6개월 만이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모차르트에 대한 준비와 계획은 이번에도 부지런히 진행되었다. 자신의 아들 일행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파리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Friedrich Melchior, Baron von Grimm 1723~1807)에게 편지를 보내 두 모자와 만날 수 있도록 미리 부탁했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25세에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어 문예 평론가로 언론에 기고 활동을 하며 루이 14세의 외손자인 루이 오클레앙 공작의 비서이자 외교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Friedrich Melchior, Baron von Grimm 1723~1807)

그림 남작과 모차르트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는 모차르트 가족이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희망과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 준 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763년, 7살 볼프강 모차르트와 12살 난네를 모차르트 남매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손에 이끌려 파리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그는 잘츠부르크 출신의 이 신동 음악가족을 인터뷰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의 쇤부른 궁에서 프란츠 1세 황제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초대로 이루어진 두 번의 성공적인 연주회를 문화 잡지에 게재하여 파리의 음악계와 귀족 사회에 모차르트의 명성을 휘날려 주었다.

 

1766년 5월, 3년 동안의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주여행을 마치고 10살과 15살이 되어 잘츠부르크로 가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 두 남매를 다시 만난 그림 남작은 실질적 상담과 도움을 주며 1766년 5월 10일부터 7월 9일까지 여러 연주회를 주선하여 주었다.

 

특히, 7월 15일자 문학평론 기고에서는 그간의 연주여행에서 모차르트 가족이 이루어낸 모든 영역에서의 놀라운 발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를 통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고 널리 알렸다.

 

1778년 3월 24일, 22살의 청년으로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모차르트를 그림 남작과 부인 루이제 데피네(1726~1783)는 변함없이 따뜻이 맞이했다. 그리고 르 콩세르 스피리튀엘(Le Concert Spirituel)의 지휘자 요제프 르그로(Joseph Legros 1739~1793) 감독을 소개했다.

 

르그로는 모차르트에게 교향곡(제31번 파리교향곡) 작곡을 의뢰했다. ‘콩세르 스피리튀엘’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열렸던 공공연주회를 말한다. 과거 왕궁이나 교회에서만 열렸던 음악회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다. 1725년에 파리에서 시작되었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1790년에 중단되었고, 1987년에 재현되었다.


고난의 연속, 파리 생활

그림 남작은 모차르트를 돕기 위해 관리자를 자청하여 조언자와 지도자의 역할을 도맡았다. 그의 인맥으로 파리에 온지 이틀째부터 작곡 요청이 이어졌다. 육군 장군과 외교관을 지낸 플루트 애호가 드기뉴 공작(Duc de Guisnes 1735~1806)은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을 주문했다.


모차르트는 발레곡 “레 프티 리엥”을 비롯한 작곡과 귀족들을 위한 초청연주회도 자주 개최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소개 받기도 했다. 재정적 어려움을 막기 위해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작곡에 대한 사례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 안나 마리아가 남편 레오폴트에게 

  파리에서, 1778년 4월 5일 

..... 

이곳의 삶은 절망적으로 불행해요.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방은 너무나 어둡고 형편없어서 종일 햇볕 한 자락도 쬐기 힘들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손바닥만 한 안마당 밖에 없고요. 비 오는 날만 빼고는 날씨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어요, 뜨개질이라도 좀 해보려고 하지만 방은 어둡고 손가락은 싸늘해서 그것도 만만치 않아요, 불을 때도 방은 추워요,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볼프강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콩세르 스피리튀엘’ 감독인 르그로 선생 댁에서 작업을 해요, 그러나 나는 온종일 볼프강의 얼굴도 못 봐요, 이렇게 더 지내다가는 말하는 법을 완전히 까먹을 것 같아요, 그만 써야겠어요, 팔도 너무 아프고 눈도 너무 아파서 더 이상 못 쓰겠어요, 

.....

 

모차르트와 어머니는 4월부터 값싼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남편의 답변은 언제나 냉정했다. 비용을 대는 사람은 그였고, 그의 목적은 아들의 훈육과 아들이 독립심을 갖고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취업의 달성을 쟁취해내는 것이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과 당장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더욱 그녀를 위축 시켰다. 자신의 조언에 무관심한 모차르트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육체적 아픔이 시작되었다. 머리와 치아에 통증이 오고 귀도 고통스러웠다. 파리 시내에서 들려오는 개혁에 대한 소문들이 공포로 다가왔다. 잘츠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더욱 간절해졌다. 6월 11일, 그녀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8년 6월 12일 

..... 

콩세르 스피리튀엘의 개막 공연을 위한 교향곡을 완성했어요. 리허설에서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얼마나 삑삑거리고 소리들이 뒤섞이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에요. 솔직히 끔찍한 지경이었고 리허설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언짢고 분개한 심정으로 속이 상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이튿날 나는 아예 그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렇지만 저녁에 날씩가 좋아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결국은 참석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대신 연주가 리허설 때처럼 엉망이면 오케스트라 속으로 곧장 걸어가서 악장(콘서트마스터) 라우사이의 바이올린을 낚아챈 다음 내가 직접 지휘를 하리라고 작정을 했죠. 

.....

 

교향곡 제31번 '파리 교향곡

6월 18일,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파리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리허설은 엉망이었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새 교향곡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마음은 이미 파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파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난생처음 아버지와 동행하지 않은 연주여행 길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일정을 진행하며 자유를 느꼈고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만하임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억지로 오게 된 파리는 겉모습만 화려했을 뿐 가슴 한 구석은 뻥 뚫려 있었다. 더구나 알로이지아와의 사랑이 유보된 상황은 항상 청년 모차르트의 정신적 안정을 흔들고 있었다.

 

과거 1763년에 신동으로서 자신이 받았던 열광적인 환호는 이미 식어 있었다. 이제는 신동이 아니라 파리에서 음악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모차르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무례함과 거만함으로 깊은 혐오감을 만들게 했고 매우 부도덕했다.

 

또한, 프랑스어가 본질적으로 비음악적이며 음악과의 융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들의 냉정한 대우는 모차르트의 반감을 높여 나갔다. 파리교향곡의 성공은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순간을 정확히 맞춰낸 모차르트의 계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어머니의 죽음

연주가 끝나고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집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며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곧바로 의사를 데려왔으나 프랑스 의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한참동안을 헤매고 다니다가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의사를 간신히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며칠이 지난 뒤에야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미 청각을 상실하고 중증 상태로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6월 29일에는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날 다른 의사를 불러왔지만 어머니는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마치고 나서는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다. 사흘 후인 7월 3일 밤 10시 20분경 안나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조용히 운명했다. 안나 마리아는 임종 다음날 파리 레알(Les Halles)에 위치한 생퇴스타슈 성당(Church of St Eustace)묘지에 안장 되었다.

 

일괄편집_임송사진2.jpg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묻힌 생퇴스타슈 성당(Church of St Eustace)

 

어머니의 죽음은 모차르트의 슬픈 일생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차마 직접 연락할 수 없었던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불린저(Bullinger) 신부께 부탁하여 부음을 알렸다. 레오폴트는 망연자실 했다.

 

닷새가 지난 7월 9일에야 아버지께 위로의 말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림 남작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레오폴트는 어머니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며 모차르트를 질책했다. 7월 30일 난네를은 27번째 생일을 맞았다. 모차르트는 누나에게 '론도 카프리치오'를 작곡하여 악보를 보냈다.

 

슬픔에 빠진 모차르트는 넋을 잃고 그림 남작의 집에서 몇 주를 보냈다. 9월 말 모차르트는 초췌한 몰골로 파리를 떠났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leaderjj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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