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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㉟ 고전주의 시대는 격동과 계몽의 시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㉟ 고전주의 시대는 격동과 계몽의 시대 서양 음악의 시대 구분 인류와 함께해 온 음악은 언제나 문학과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왔다.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음악사조의 흐름에 영향을 준 문예사조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문예사조는 미술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므로 음악사조를 알려면 먼저 미술사조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미술사조는 중세시대,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이어져왔다. 음악사조는 문학이나 미술 사조의 뒤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도 미술사조의 영향권 내에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20세기음악 등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 중 고전주의에서 고전은 클래식(Classic), 고전주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Classic Music)을 의미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과 비교하여 서양음악 자체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클래식 음악)은 음악사에서 1750년에서 1810년까지 60년 정도의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빈(vien)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을 가리킨다. 고전주의 음악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베토벤(L.V.Beethoven, 1770~1827)이었다. 독일문학에서 정의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근거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고전적이라고 표현하면서 고전주의 시대 음악이라는 구분이 시작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역사적 배경 고전주의 시대는 계몽주의 사상의 시대였다. 바로크시대의 말미인 1680년경부터 유럽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사회풍조를 가져오면서 18세기 유럽에는 칸트(Kant)와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등의 철학사상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에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은 경제학 분야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자연과학 분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백신(vaccine)이 개발되고 증기기관, 방적기계, 전동기, 발전기 등이 발명되어 1750년경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의 여파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18세기 후반은 사회적 계급과 질서가 무너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사회의 변혁은 프랑스혁명으로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계몽주의적 가치관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까지 널리 퍼져나가 미국의 독립선언을 촉진하기도 했다. 인도주의 이상은 미국 독립선언문으로 상징화되고 1717년에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지부가 설치되기 시작한 프리메이슨(Freemason)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밴자민 프랭클린(B. Franklin), 조지 워싱톤(G. Washington), 괴테(Goethe)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바로크시대 음악(Baroque Music) 예술을 즐기려는 욕구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인 1600년에서 1750년의 바로크시대부터 팽배해 있었다. 왕족과 지배층 귀족들은 관현악단을 소유하고 연주자와 작곡가를 고용하여 새로운 곡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채워나갔다. 여기에다 부(富)를 축적한 중산층 사이에서도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 평민을 대상으로 한 공연장과 공연이 점차 늘어났다.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애용되던 다성 음악을 넘어 기교적이고 화성적 경향이 강한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바로크시대에는 작곡가 과잉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많은 음악 작품과 작곡가가 탄생했다. 바흐는 칸타타를 비롯한 종교음악에 혼신을 다했고, 헨델은 영국 오라토리오와 이탈리아 오페라 등 종교와 세속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통해 교향곡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이탈리아를 근간으로 생겨난 수많은 음악형식들은 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급격히 발전하였고 고전주의로 연결되었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Classical Music) 고전주의 시대를 표상하는 음악사조의 근원은 이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자 극도로 과장되고 장식적이던 바로크 양식은 고전시대의 비율과 균형에 맞추어 절제되고 정돈된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등의 형식이 자리를 잡았다. 고전주의 양식의 기초는 대(大)바흐의 아들들(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요한 크리스찬 바흐,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과 요한 슈타미츠로 대표되는 만하임 악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이든은 바로크 시대에서 태동한 이 모든 장르를 완성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고전주의 시대를 펼쳐나갔다.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은 그 중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던 하이든, 모차르트, 글루크, 베토벤 등 4인의 음악가들이 주도하였다. 하이든의 일생은 커다란 사회적 변혁의 두 시대에 걸쳐있었다. 하이든은 음악가를 후원하는 귀족 지배층의 보호와 지원으로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작곡가였다. 고전주의 교향곡은 대부분 첫 악장이 빠르게 시작하여, 느리고 서정적인 둘째 악장으로 이어지고, 트리오나 미뉴엣 등의 춤곡이 세 번째에 나온 다음 빠른 네 번째 악장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런 구성은 수백 곡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하이든의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에서 기틀이 잡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훗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으로 불리게 되는 이러한 기악곡 양식은 교향곡과 현악뿐만 아니라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 연주자의 개인 기량을 아낌없이 발현할 수 있는 협주곡(Concerto)의 출현과 발전을 도출하였다. 하프시코드에 이어 안정적인 강약을 표현하는 피아노포르테(Piano)가 발명되자 독주 소나타는 모차르트 이후 더욱 사랑받는 음악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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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㉞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우정[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천재와 거장(巨匠)의 만남 하이든은 젊은 시절부터 30여 년을 헝가리의 귀족인 니콜라우스 1세 에스테르하지 공작(NikolausⅠ, Prince Esterhazy, 1714~1790)의 가문에서 악장으로 지내며 작곡에 전념하며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두 사람은 세상의 소문과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작품들을 통해서만 상대의 천재성과 능력을 짐작하며 기억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알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만난 것은 1784년으로 하이든은 52살, 모차르트는 28살이 되었을 때였다. 하이든은 그의 고용주이자 후원자인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겨울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서 머물다가 헝가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가끔씩 40km 떨어진 빈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3년 전부터 빈에 머물며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가 17살이 되던 1773년에 아버지 레오폴트와 함께 빈에 왔을 동안에 작곡한 초기 현악 4중주곡(K.168~173)에 이미 하이든의 작품 ‘태양 4중주’(Op. 20, 1772년 발표)에서 받은 영감이 영향을 끼쳤다. 이 태양 4중주곡은 하이든에게 ‘현악 4중주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해 준 작품 중 하나로 향후 200년 동안 세상의 모든 현악 4중주곡을 정의하는 작곡 기법으로 이어졌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6개의 현악 4중주곡'모차르트가 헌정한 6개의 모차르트 현악4중주곡(K. 387, 421, 428, 458, 464, 465)은 그들의 우정 초기에 작곡되었고 1785년에 출판되었다. 모차르트가 이 여섯 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은 헌납자가 대개 귀족이었던 당시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모차르트의 삶에서 작곡에 관한 한 힘들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작곡은 머릿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며 악보로 옮기는 일은 거의 수정 없이 작업하였다. 그런데, 하이든에게 헌정한 곡에 대한 헌사에는 ‘참으로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음악 역사가들은 이 표현을 하이든에 대해 인간적 관계보다 예술적 존경이 훨씬 많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출판 악보는 당연히 깨끗하지만 원본 악보를 세밀히 살펴보면 다른 악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많은 수정 흔적이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존경하는 하이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엄격한 양식에 맞추어 힘들게 작곡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와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의 만남은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벗으로서 끝없는 신뢰와 애정을 나눈 가장 아름다운 우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나이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인정한 하이든의 넓은 도량과 모차르트가 일생동안 파파 하이든으로 부르며 그에게 바친 존경이 깔려 있다. 하이든은 계속되는 모차르트와의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헨델과 글루크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음악가였고,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보편성을 찾아내는 모차르트의 우월한 음악적 재능을 직감했다. 그리고 숨기지 않고 바로 주변의 모든 이에게 공개했다. 친구들에게 모차르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1787년 12월에 그의 친구이자 프라하의 고위 지방관리였던 프란츠 로트(Franz Rott)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차르트가 가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 모든 음악 애호가의 영혼, 특히 고위 인사의 영혼에 동일한 음악적 이해와 동일한 방식으로 깊이 감동시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든 국가들은 그러한 보석을 가지기 위해 끝임 없이 경쟁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어서 말미에는 “그리고 대우도 잘해 주어야 한다. 돈이 없는 천재의 생활은 슬플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후대에도 그런 노력을 하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희망에 찬 천재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천재 작곡가가 아직 한 번도 황궁이나 왕궁에서 직책을 맡은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내가 지나친 말을 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요제프 하이든이다”라고 마무리했다. 하이든은 영국의 음악 역사가이자 음악가인 찰스 버니(Charles Burney, 1726~1814)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재적이라고 친구들로부터 종종 칭찬을 받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훗날 1790년 5월 30일, 여섯 자녀의 어머니였던 친구이자 음악가인 마리안느 폰 겐칭거(Marianne von Genzinger, 1754~1793)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든은 음악적 재능을 펼치는 모차르트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했다. 헤어지는 두 사람 1790년 12월, 하이든은 바이올리니스트 잘로몬(J. P. Salomon, 1745~1815)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6곡의 새로운 교향곡을 만들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빈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영국으로 들어가 6곡의 교향곡을 추가하여 오늘날 '잘로몬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12곡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 모차르트는 파도가 높은 도버해협을 건너야 하는 나이든 하이든의 위험한 일정이 걱정되어 하이든의 영국행을 만류했다. 하이든은 ‘음악이야말로 만인 통용의 언어’라는 믿음을 보이며 ‘내 언어는 세계에서 이해된다’는 자신감에 넘치는 명언으로 답변을 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작별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울면서 하이든을 배웅했다. 그러나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사람은 모차르트였다. 1년 후 영국 런던에서 모차르트의 죽음을 전해들은 하이든은 “후세 100년 이내에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탄식과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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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㉝ 하이든에게 바친 현악4중주곡[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의 중심인물로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을 통한 소나타 형식의 기악형식을 완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784년(모차르트 28살), 영국을 비롯한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명성을 떨치던 52세의 요제프 하이든(F. J. Haydn 1732~1809)이 빈에서 28세의 모차르트를 만났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보다 나이가 24살이나 많았다. 그는 이미 생존해있는 세계 최고의 작곡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그동안 서로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능력을 존중해 주었다. 두 사람은 자주 모차르트의 집에서 합주를 하곤 했다. 1785년 2월 11일부터 아버지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모차르트를 찾아와 아들의 집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다정한 친구가 되어 지내는 모습을 본 레오폴트는 깜짝 놀랐다. 더욱이 나이 많은 당대 유럽 최고의 음악가가 아들에게 보이는 진정한 우정을 보고는 더욱 감격했다. 2월 어느 날 모차르트는 파티를 마련하고 하이든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작곡한 일명 ‘러시아 사중주’라 불리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33의 6번을 듣고 얻은 감흥을 표현한 변주곡을 연주했다. 이 변주곡을 듣고 난 뒤 하이든은 레오폴트에게 “나는 신에게 맹세하고 말한다. 너의 아들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라고 말했다. 러시아 사중주곡은 서양음악사에서 현악 사중주곡의 진정한 탄생을 알린 작품으로 불린다. 하이든이 확고하게 정립한 러시아 사중주곡을 시작으로 모차르트의 현악사중주곡과 베토벤의 현악사중주곡이 세상에 나타나 오늘날까지 인류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영국에 기반을 두고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올리언 사중주단(Aeolian Quartet)이 연주한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곡 Op33 No.6번이다. https://youtu.be/_5l1XynrMbc?si=RnLwBk5h5suS0bTZ 드디어 1785년 9월 1일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1782년부터 1785년까지 3년동안 작곡해 오던 현악사중주곡 6곡을 다듬고 또 다듬어서 친구이자 파파(papa) 하이든이라고 부르며 존경해오던 요제프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오늘날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사중주곡’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다음은 당시 아르타리아 출판사에서 제작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한 초판 악보에 들어있는 ‘모차르트가 요제프 하이든에게 헌정한 6개의 현악 4중주곡’에 곁들여진 모차르트의 헌사 내용이다. 편지형식으로 쓰인 이 헌사에는 헌정하는 6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자신의 6명 아들로 묘사하여, 훌륭한 스승이자 우정어린 친구에게 자식을 맡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빈에서 1785년 9월 1일에 씀 친애하는 벗 하이든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한 아버지로서, 일생 최고의 행운으로 최상의 벗이 된 고명한 분의 지도와 보살핌에 자식들을 맡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고귀한 분이며 또한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이여, 이 작품들은 바로 나의 여섯 아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참으로 오랜 노력의 결실입니다. 가장 친애하는 벗이여, 당신은 최근 이 도시에 와 지내면서, 직접 나에 대해 만족을 표명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인정해주셔서 저는 큰 용기가 솟았고, 고통 끝에 이들을 낳았습니다. 이들을 당신에게 바친다 해도 그 호의에 값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를 받아주셔서, 그들의 아버지와 지도자와 벗이 되어주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이 아이들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당신에게 넘깁니다. 그러므로 저의 눈이 지나쳤을지도 모를 결점을 관대히 보아주시고, 당신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저에게 언제까지나 너그러이 그 우정을 베풀어주시길 부탁합니다. 충심을 다하는 당신의 가장 성실한 벗, W. A. 모차르트 다음은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N0.14번 ~ No.19번까지의 곡이다.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4, K.387 https://youtu.be/Uf1xJHeUZGA?si=ut9DOjgz094ysItp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15번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5, K.421(417b) https://youtu.be/03cxqYUY10s?si=cRiB-P0eLrxcBD2e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16번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6, K.428(421b) https://youtu.be/QqPHGcW7JEw?si=sMNIe8HfkdfK5swe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17번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7, K.458 https://youtu.be/SjIBK7A8wl4?si=nsRbRMWcSmCXVRD0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18번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8, K.464 https://youtu.be/tbZLN_Uc87A?si=lx9zxageDl6ExXBI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19번 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9, K.465 https://youtu.be/f3oK4XVMARs?si=5snR7ieluxPMdTCy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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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㉜ 모차르트의 자녀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천상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여주지만 그의 인생은 이와 반대로 반목과 어려움이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노력은 누구보다도 컸지만 오히려 갈등은 계속 깊어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늦게나마 아버지의 허락 편지가 도착하자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너무나 바쁜 일정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11월 11일에 취소하였다. 1782년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차르트의 바쁜 일상이 들어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머리를 다듬고 아침식사를 한 다음 7시에는 의복을 차려입고 9시까지 작곡을 했다.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레슨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 후에는 오후 6시까지 손님을 만났다. 연주회가 있거나 저녁에 공연이 없는 날은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작곡을 했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작곡에 매달렸다. ‘저는 배가 고플 때가지 곡을 씁니다’라는 표현도 있다. 1783년 1월 5일, 임신부 콘스탄체는 21살이 되었다. 4월 24일, 모차르트 부부는 출산을 위해 유덴플라츠 3번지에 있는 넓은 아파트 2층집으로 이사했다. 1783년(27살) 6월 17일, 첫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할아버지 이름 레오폴트(Leopold)를 넣어 라이문트 레오폴트 모차르트(Reimund Leopold Mozart)로 지었다. ‘후궁탈출’의 호평과 연주가 이어지고 작곡의뢰가 늘어나자 상황이 호전되는 현실을 느낀 모차르트는 다시 잘츠부르크 방문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와 누나에게 확실한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성공이 시작되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판단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가지 못했던 이유는 2년 전에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고 명한 콜로레도 대주교에 대한 곤란한 입장과 아버지에게 붙들려 빈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수입도 늘고 빈에서의 미래가 밝아지고 있었다. 가족이 다시 모여 빈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1783년 7월 25일, 모차르트 부부는 갓난아기를 믿을만한 유모에게 맡기고 서둘러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이번 귀향은 1781년 1월에 뮌헨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5주 동안 지내다가 모차르트가 빈으로 떠난 이후 2년 반 만에 가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었다. 콘스탄체로서는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만나는 상견례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체와의 만남을 계기로 가족과의 화해를 이루고자했던 모차르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난네를이었다. 그녀는 콘스탄체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콘스탄체는 결혼 전에 난네를에게 ‘우정의 편지’를 보내 간곡히 배려를 청했던 터라 은근히 호의적인 태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난네를이 냉정한 거부의 태도를 바꾸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기 전날, 10월 26일에는 잘츠부르크의 변방에 있는 상트페터 수도원에서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가 초연되었다. 이 곡은 주문자의 의도나 전례의 필요에 의해 작곡된 다른 종교음악과는 달리 자신의 결혼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작곡한 작품으로 대규모의 악기편성으로 되어 있었다. 미사통상문 중 ‘크레도(거룩하시도다)’를 아직 작곡하지 않은 상태여서 상트루퍼트 주교좌성당에서는 연주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10월 27일 모차르트 부부는 아버지와 누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3개월 동안 함께 지냈지만 난네를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날 헤어진 모차르트와 난네를 남매는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빈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유모에게 아들을 찾으러 갔다. 유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말을 전했다. “라이문트는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여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일부러 연락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첫 아들 라이문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평생의 큰 상처로 남았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모두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삼남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는 1개월 만에 사망하고, 장녀 테레지아는 6개월 만에 사망했다. 차녀 안나 마리아는 사산되었다. 18세기에도 유럽의 유아 생존율은 여전히 낮았다. 차남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년 9월 21일~1858년 10월 31일)는 빈에서 태어나 7살 때인 1791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동생 프란츠와 함께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프라하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음악가의 길을 싫어했다. 카를은 1810년에 밀라노의 나폴리 총독궁의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아버지 모차르트의 음악적 업적을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세 번 공연하는 대가로 밀라노 북부의 농장을 구입하였고, 부유하게 살다가 1858년에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남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콘스탄체에 의해 훌륭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작곡을 배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와 음악 교사로 살았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4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고, 음악적으로도 당대의 음악적 조류였던 낭만파를 받아들이지 않고 빈 고전파 풍으로 작곡을 했기 때문에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내성적이고 겸손하여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이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820년대에는 50인 작곡가에 포함되기도 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감독과 지휘자로 초빙되어 음악활동을 하였다. 프란츠는 1844년에 53세로 칼스바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번역하면, 'May the name of his father be his epitaph, as his veneration for him was the essence of his life(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비명이 될지어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삶의 근간이었다)' 다음은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 중 ‘하이든의 73회 생일 축하 칸타타 (Cantate to Joseph Haydn’s 73rd birthday)’이다. 어머니 콘스탄체는 아들들에게 죽은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면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 아들은 모두 훌륭하지 못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나마 차남 카를은 그마저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두 아들은 필요 이상으로 조용하게 살았고 아버지의 명성을 누리면서도 능력과 재능은 그 자리에 미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직계는 여기서 다 끊겼다. 따라서 모차르트의 남은 후손들은 모두 직계가 아닌 방계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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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㉚ 행복한 신혼[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모차르트의 편지 1782년 8월 7일, 결혼식을 마친 사흘 후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편지를 썼다. “온갖 다정함과 말할 수 없는 너그러움으로 보내주신, 동의와 축복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키스하며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라는 인사로 시작된 글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콘스탄체가 감사하게도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저는 편지가 올 것을 기다리며 이틀을 허송하였습니다. 교회에서의 혼례 날을 정해 놓았기에 아버지의 동의를 받으리라 완전히 기대하며 안심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입니다만 제가 아버지의 사랑에 너무 의지하고 허겁지겁 기대하였던 것 같아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고 하객이 몇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우리가 결합되었을 때 아내도, 저고 울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신부님까지도 함께 울었습니다. 두 사람의 눈물을 눈앞에서 봤으니까요.” 편지 말미에는 아버지와 누나에 대한 간절한 청원과 결혼 피로연 내용을 적었다. “아버지께 제가 얼마나 진실을 사랑하는지, 또한 제가 얼마나 거짓을 증오하는지를 알려 드릴 증거를 보여 드렸습니다. 또 제 사랑하는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아버지가 축복해 주시길, 사랑하는 시누이가 더할 나위없는 귀중한 우정을 앞으로 계속 유지해주시길 부탁드리는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 “혼례 축하연은 모두 폰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이 준비해주신 만찬으로 진행되었는데, 실로 남작이라기보다는 군주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사랑하는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로 여행할 일을 이전보다 백배의 낙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맹세코, 맹세코 말씀드리지만 아버지가 그 사람을 보시면 제 행운을 틀림없이 기뻐해주실 겁니다! 제 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눈도 마음씨 좋고 정직하며 정숙하고 상냥한 아내가 바로 남편의 행복이라고 보신다면 말예요.”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에게 보냈던 우정의 편지 아버지뿐만 아니라 누나 난네를도 자신들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모차르트는 몇 달 전 (4월 20일) 에 누나에게 새로 작곡한 푸가 C장조 (K.394) 악보를 보내면서 이 푸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건 나의 사랑하는 콘스탄체 덕분이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콘스탄체가 난네를에게 보내는 우정을 청하는 편지를 동봉했었다. “아직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당신은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저에겐 무척 소중한 분입니다. 그토록 훌륭한 동생의 누나라는 사실 하나로 저는 당신을 사랑하며, 감히 당신의 우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럴 자격이 제게 조금은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며, 저 또한 마음을 바쳐서 우정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같은 날, 콘스탄체가 난네를에게 보낸 편지. 난네를은 이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모차르트 부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늦기는 했지만 아버지 레오폴트의 결혼에 대한 허락과 축복의 편지도 도착하고, 2주전 개막 공연에서 대성공한 새 오페라 “후궁 탈출”은 9월 6일과 20일 공연에 관객이 넘쳤다. 요제프 2세 황제가 다시 관람을 한 9월 24일 공연에는 관객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 프라하 궁정에서는 100두카트(18세기 통화기준 환산 약 2000만원)를 지불하면서 악보를 필사해 갔다. “후궁 탈출”의 성공은 어떠한 결혼 선물보다도 두 사람을 기쁘게 했다. 이것은 모차르트의 빈 정착이 자리를 잡았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귀족들의 후원이 늘어나고, 황제로부터 궁정으로 들어오라는 소식이 들릴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모차르트는 실패했던 과거를 잊어버린 것처럼 파리로 진출해 볼까? 라는 생각도 했다. 런던으로 가면 어떨까? 라며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달콤한 신혼을 보냈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음식에 대한 취향도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바뀌었다. 개인들의 후원 외에도 교습과 악보 판매, 대중콘서트 수익에 희망을 걸고 빈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발판을 마련해 나갔다. 특별한 작곡에 대한 주문도 받아가며 기적 같은 손놀림으로 기적에 가까운 작곡 작품을 쏟아냈다. 분수에 넘치는 호화생활도 지속해 나갔다. 이 신혼 시기는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콘스탄체는 그에게 작곡에 필요한 많은 영감을 주었다. 당시에 잘츠부르크 성 베드로 교회에서 열릴 미사에서 그녀가 부를 예정이었던 대미사 다단조의 소프라노 부분을 포함하여 그녀를 위한, 그녀가 준 동기부여에 의한 여러 작품들을 이 때 작곡하였다. 결혼 직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C장조 K.403 1782년 8월 초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C장조 K.403 악보에는 “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첫 소나타”(‘Sonate première. Par moi W. A. Mozart pour ma très chère Epouse’)라는 글귀가 씌어있다. 피날레와 주로 단조로 펼쳐지는 실질적인 발전 부분을 포함하여 마지막 악장의 나머지 부분은 모차르트가 사망한 이후에 작곡가이자 음악 역사가인 막시밀리안 슈타들러(Maximilian Stadler, 1748~1833)가 제공하여 완성했다. Mozart Violin Sonata No. 30 C Major K. 403 1. Allegro moderato (4’47) 2. Andante- (2’46) 3. Allegretto (4’38) 모차르트의 초기 바이올린 소나타에 대해 분석하려고 하면 당시의 피아노가 현재 사용되는 현대 피아노에 비해 지속력이 매우 약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의 소나타 작곡은 피아노에 부족했던 깊이와 서스테인을 바이올린에서 보강해 주었다. 1780년대의 소나타는 지금의 학계에서 분류하는 것과 같은 고정된 작품이 아니었다. 초기 바이올린 소나타는 작곡가가 원했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하나의 악기가 되는 ‘비오피아노(Viopisno)’라고 볼 수 있다.이 작품은 1830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쉬운 소나타'라는 의미가 있는 다장조 소나타는 모차르트의 실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편안한 시작 주제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단조로 바뀌면서 긴 전개 부분을 소개하는 첫 부분이 강렬하게 시작된다. 느린 움직임이 시작될 때 피아노의 프레이즈는 부드럽게 하강하는 아르페지오 모티브로 강조된다. 바이올린 솔로의 시작 주제에 이어 모차르트는 단조에서 솟아올라 열정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그 이후는 거의 단조로 유지된다. 아르페지오 모티프의 발전은 짧은 변조 연결이 알레그레토 피날레의 주제로 직접 연결되기 전에 A단조의 긴 반음계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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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 순탄치 않은 콘스탄체와의 결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은 지난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양쪽 집안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1782년 1월 1일, 모차르트와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은 콘스탄체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모차르트 손에 이끌려 돌아 온 콘스탄체를 본 베버 부인은 딸을 껴안고 기뻐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대로 바로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차르트에게는 가난한 음악가에게 내 딸을 보낼 수 없으니 돈이나 열심히 모으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모차르트는 당장에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이 주선해 준 폰 트라트너 부인과 치히 백작부인 등 세 명에게 한 달에 6두카트(120만 원 상당)씩을 받기로 하고 끔찍이도 싫었던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음악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요제프 2세 황제의 막내동생)의 궁전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에게는 계속해서 설득의 편지를 보냈다. 그즈음 잘츠부르크의 가족들은 모차르트가 체칠리아 부인의 꾐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빈에서의 모든 사건을 베버가족의 음모라고 믿는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1월 3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아주 급하게 씁니다. 지금은 밤 10시 반입니다. 토요일까지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걸 부탁드려야 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밖에 쓸 수가 없으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도메네오, K 366’의 오페라 대본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발표회는 사순절의 제3일요일에 열립니다. 그래서 즉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라 ‘후궁탈출, K 384’는 잠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글루크의 큰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와 ‘알체스테’를 위한 것 가사 중 꼭 고쳐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늦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절이 지나면 곧 상연될 겁니다. 이제는 펜을 놓아야 합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겠습니다(이걸 쓰지 않았다가는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제가 사랑하는 콘스탄체가 그런 심한 생각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런 나쁜 마음의 여자를 사랑하는 짓은 할 수 없다는 걸 꼭 믿어주시겠죠. ..... 우리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최고인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만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속히 그곳에 갈 일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씨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든든한 지지자 슈비텐 남작을 만나다 바쁘고 힘든 일상이 이어지던 중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 황제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소중한 지지자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G. F. Van. Swieten, 1733~1803)을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주치의가 된 아버지를 따라 빈으로 와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테레지움이라 불리는 엘리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을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에게 발탁되어 외교관, 도서관제도 혁신가 등 정부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슈비텐 남작은 외교관 시절부터 시간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매우 열정적인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을 발전시켰다.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흠모하여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구하였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반 베토벤에 대한 후원자로서 음악역사에 기록될만한 헌신을 하였다. 1782년 1월 27일, 26살이 된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장 슈비텐 남작이 기거하는 공관에서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며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슈비텐 남작은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팀을 주도하는 실력자로서 모차르트에게 “이곳을 매주 일요일 정오에 음악가들에게 개방하겠다. 당신의 작품들과 바흐, 헨델의 음악을 연주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정수에 도달했던 바흐 음악과의 교감을 통해 커다란 음악적 영감을 얻게 되었다. 슈비텐 남작에 의해 황실 도서관에 고용된 모차르트는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수십만 권의 모든 도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빈에서 얻은 이 기간 동안에 모차르트는 대위법을 활용하여 소나타 형식의 작곡을 능숙하게 익혀 자신만의 음악 색채를 만들어냈다. 슈비텐의 일요음악회에는 빈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여했는데 요제프 하이든도 그 중의 일원이었다.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 이외에도 갈리친 후작(Prince Nikolai Borisovich GalitzinGolitsyn, 1794~1866)의 후원으로 그의 살롱에서 매주 두 번씩 연주를 했다. 갈리친 후작은 러시아 귀족 가문으로 아마추어 음악가이며, 특히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3개의 현악 4중주(Op. 127, 130, 132)를 의뢰한 음악 후원자로 유명해졌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4월 1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이달 2일의 편지에 따르면 모든 걸 무사히 받으셨다죠. 아버지는 시곗줄과 담뱃갑, 누나는 2개의 모자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담뱃갑도 시곗줄도 제가 산 게 아니라, 모두 사파리 백작이 보내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콘스탄체에게는 두 분의 안부 말씀을 전했습니다. 콘스탄체는 그 답례로 아버지 손에 키스를, 누나에게는 마음으로부터의 포옹을 보내며, 두 분의 친근한 벗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2개의 모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의 소망이었으니까요. ..... 제가 분명 황제 밑에서 일하게 되리라는 소문에 대해 쓰셨는데, 그런 일을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저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온 거리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게 축하의 말을 건넨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황제께서 계신 곳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고,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걸 저는 기꺼이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황제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데까지 와 있다는 이야기니까, 제가 그 때문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딘 것도 아닙니다. …… 저는 일요일마다 12시에 슈비텐 남작에게 가는데, 그곳에서는 헨델과 바흐 이외의 것은 전혀 연주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흐의 푸가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것만이 아니라 에마누엘과 프리데만 바흐, 그리고 헨델의 것도요. 그리고 저는 남작에게 에벌린(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잘츠부르크의 악장)의 것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영국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대 바흐의 아들)가 별세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음악계로서는 아쉬운 일입니다! 슈비텐 남작과 일을 하며 바흐의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미 서로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진 서신이 수차례 오고간 터에 상대적 소외를 깊이 느끼고 있는 두 사람의 불화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는 듯한 아버지의 침묵에 조급해진 모차르트는 결혼식 날이 임박해 오자 거듭 결혼 허락을 애걸하는 글을 보냈다. 1782년 7월 16일, 오페라 ‘후궁탈출’이 개막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드디어 레오폴트의 답신이 모차르트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7월 31일 26일자 편지를 오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오페라 ‘후궁탈출, K 384’가 호평이었다고 알려드린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이 담기지 않은 쌀쌀한 편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빈에서 누구나 더는 다른 걸 들으려 하지 않겠다는 듯 대소동이 벌어지고, 극장을 언제나 가득 채워놓은 아들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나머지 보퉁이를 여는 손도 들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4번째 공연이 열렸고 금요일에도 또다시 열립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럴 틈이 없으셨던 거겠죠…… 그동안 저의 지난번 편지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는 제 결혼에 동의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니, 실제로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편지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콘스탄체 베버)은 훌륭한 부모에게서 난 정직하고 착실한 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저에게 써 보내신 일, 물론 앞으로 쓰시는 내용이 모두 호의에서 나온 조언일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얼마나 훌륭하고 친절한 것이든 한 여자하고 여기까지 와버린 인간에게는 도무지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미루어놓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반듯하게 정비하고 성실한 남자가 되어야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보답해주시겠죠. 저는 자신을 비난할 만한 일은 일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마침내 결혼 1782년(모차르트 26살, 콘스탄체 20살) 8월 2일, 모차르트는 결혼 예고 절차를 면제해달라는 청원서를 교구에 제출하고, 콘스탄체와 함께 호엔 브뤼케의 테아티너 수도원으로 가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결혼서약서에 서명했다. 8월 4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허락과 축복을 받지 못한 채 성 슈테판 대성당 엘리기우스 소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은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 두 사람의 후견인이자 증인인 토르바르트, 모차르트의 어릴 적 친구인 빈의 외과의사 프란츠 길로프스키, 막내 처제 조피, 콘스탄체의 손을 잡고 모차르트에게 인도한 지역 참사관 헤르 폰 체토, 그리고 몇 명의 신랑 들러리가 전부였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결혼 허락 소식은 결혼식을 마치고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피로연을 가질 때 도착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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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㉙ 모차르트의 결혼2[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콘스탄체의 언니 알로이지아를 먼저 사랑했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1778년(22살) 1월 초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는 연주여행 중에 만하임에서 처음으로 베버 가족을 만났다. 지인들의 소개로 악보를 베끼기 위해 베버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이 계기였다.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로돌린 베버는 독일 국민 가극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이자 피아노 독주곡 ‘무도회의 권유(1819년)와 가극 ’마탄의 사수(1821년)등으로 유명한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아버지와 사촌 간이었다. 2년 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관 비서관 일을 하다가 직장을 잃은 그는 오페라의 베이스 가수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악보를 필경해 주거나 무대의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집에 갔을 때마다 음악활동과 여행에만 몰두하느라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가족들의 정을 느꼈다. 콘스탄체 베버는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 1733~1779)의 셋째 딸이었다. 모차르트는 처음에는 콘트탄체 보다 먼저 그녀의 언니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다. 베버와 그의 부인 체칠리아에게는 딸이 넷 있었다. 큰딸 요제파는 20살로 체격이 크고 건강했다. 둘째 딸 알로이지아는 18살로 용모가 예쁘고 가창력이 매우 좋았다. 콘스탄체는 16살, 막내딸 조피는 15살이었다. 네 자매는 모두 뛰어난 성악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알로이지아의 언니 요제파는 화려한 기교와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1791년에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 초연 때 ‘밤의 여왕’역을 맡았고 이 배역을 43살까지 해냈다. 베버의 가족들과 친해지다 알로이지아는 이미 기성 성악가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궁정극장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악보 필경 주문을 위해 베버의 집에 드나들며 베버의 딸들과 친해져서 같이 노래하고 피아노를 반주해 주던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랑을 느꼈다. 1월 말에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5세의 누이 카롤리나 공주가 개최하는 음악회에 초청을 받은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에게 연주비의 반을 주겠다고 제안하여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와 함께 소요시간이 10시간이나 걸리는 네덜란드령 키르히하임볼란덴 성으로 갔다.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오페라 '루치오 실라'의 아리아 두 곡을 불렀다. 악보는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가 필사해 주었다. 연주는 호평을 받았고 금화 8루이를 받았다. 약 3개월을 만하임에 머무르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떠날 때에도 모차르트의 머릿속은 온통 알로이지아(18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10개월 후 파리 생활 중에 어머니를 여읜 모차르트가 장례식을 마치고 홀로 잘츠부르크로 출발했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간절한 바램이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중간에 만하임으로 가 베버 가족을 찾아갔다. 베버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은 모차르트는 다시 뮌헨으로 향했다. 그동안 베버 가족들의 상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알로이지아로부터 사랑을 거절당하다 프리돌린 베버는 다시 직장을 구해 식구들을 이끌고 뮌헨으로 거처를 옮겼다. 알로이지아도 뮌헨에서 프리마돈나로 성공하여 큰 수입을 올리며 오페라 무대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격식을 갖추어 알로이지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이미 성공하여 뮌헨 궁정악단에서 1,000플로린(18세기 통화기준 환산: 약 5천만원)을 벌고 있고, 앞으로도 더 큰 성공에 대한 꿈에 부풀어있던 그녀는 재능은 있으나 미래가 불분명한 청년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낙담했으나 담담하게 행운을 빌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선물을 전했다. 6개월 전 전했던 미완성본 악보의 마지막 완성본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알로이지아의 아름다운 음성과 음역에 맞도록 맞춤 작곡한 알로이지아를 위한 연주용 아리아 '테살리아 사람들이여!(Popoli di Tessaglia! K.316)'였다.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성악가들의 즐겨 노래하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다음 글은 모차르트가 청혼을 거절당하기 반년 전에 미완성 아리아 악보를 알로이지아에게 일부만 보낼 때 썼던 편지 내용이다. 존경과 사랑, 걱정과 위로가 넘쳐흐르는 사랑에 빠진 애틋한 젊은 청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파리에서, 1778년 7월 30일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부탁한 아리아를 위한 변주곡을 이번에는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의 편지에 가능한 한 속히 답장을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그 뒤에 쓸 시간이 없어졌고, 그래서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편지로 꼭 보내겠습니다. ..... 그리고, 이 기회에 거의 절반가량 되어 있는 아리아 '테살리아 사람들이여' - 소프라노를 위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K 316(300b)도 보냅니다. 보고 나서 혹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만족해주신다면 나도 행복하겠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했노라고 당신 스스로의 반응을 들을 때까지는(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쓴 곡이므로,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칭찬을 듣고 싶거든요), 그때까지는 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 가운데 이 장면이 지금까지 만든 것 중 최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나의 '안드로메다'의 1막‘아, 그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Ah, lo previdi)’에 열심히 정력을 기울여주신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장담하건대, 그 막은 당신에게 딱 어울리고 당신의 이름을 크게 높여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감정을 표현하길 권합니다. 가사의 의미와 강도를 잘 생각해서, 진심으로 안드로메다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 자신이 된 기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낸다면, 당신의 그 대단히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창법으로 노래한다면 단시간에 틀림없이 멋진 일이 일어날 겁니다. 이번에 드리는 편지는 대체로 내가 당신에게 이 막의 노래와 서창(敍唱)을 어찌 해주시길 바라는지, 그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때까지 직접 이를 연구하시길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차이를 이해하게 되어서, 당신은 크게 향상될 겁니다. 물론, 고치거나 새로 해드릴 부분은 별로 없을 것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스스로 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연구한 아리아 ‘Non so d’onde viene K.294‘에 대해서는 내가 트집 잡거나 고치거나 할 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대로 맛깔스러운 기법과 표정으로 노래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역량과 지식을 전폭 신뢰합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능력이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 말이죠. 다만 권해드리면서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부디 내 편지를 여러 번 되읽고, 내가 조언한 대로 해줬으면 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말하고 또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을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뜻이 없음을 믿고 안심해주십시오. 친애하는 친구여,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몸 상태에 신경 써주십시오. 건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니까요. 나는 몸에 관한 한, 고맙게도 튼튼합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능이 언젠가 정당하게 인정받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기까지는, 결코 편안해지지 않겠죠. 그러나, 내가 가장 기쁜 상태가 되는 때는, 당신과 다시 만나 진심을 다해 포옹하는 최상의 기쁨을 맛보는 날입니다. 이것이 또한 내가 그리워하고 바랄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다만 이 희망과 징조 속에서만, 유일한 위로와 평안을 발견합니다. 부디 때때로 편지 주십시오. 당신의 편지에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 가장 친애하는 친구여,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너무 기다리게 하거나 애타게 하거나 하지 마시길…… 당장에라도 소식 전해주시길 바라면서, 당신 손에 키스를 하고, 마음을 담아 포옹합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의 성실한 친구, W. A. 모차르트 저를 대신해서, 어머님과 누님, 여동생 등 모든 사람을 포옹해주세요.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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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 또 하나의 삶의 과제 ‘결혼’ 1782년(26살) 7월 16일에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로서 빈 생활을 시작하고, 빈(Wien) 궁정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에서 3막 희극 징슈필 ‘후궁 탈출(K.384)’ 초연을 마친 뒤, 결혼이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삶의 과제가 앞으로 다가왔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이미 불화가 깊어진 아버지와의 관계는 ‘후궁 탈출’의 성공으로 화해의 끈이 아직은 이어져 있었지만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반드시 허락을 받고자하는 아들의 관계는 여전히 팽팽한 평행선이었다. 작년(1781년) 5월, 궁에서 쫓겨났지만 빈에 남기로 한 모차르트는 갈 곳이 없었고, 프리돌린 베버가 사망한 후 빈으로 이사 온 베버 가족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체칠리아(베버의 미망인, 콘스탄체의 어머니) 부인은 빈에서 숙박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 때 사랑했던 알로이지아는 이미 출세하여 큰 부자가 된 요제프 랑게(희극 배우)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모차르트의 뇌리에 항상 따뜻한 보금자리로 남아있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의 집 2층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시만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7월 13일에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장기적으로 기거하기로 작정한 뜻을 전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체칠리아 부인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콘스탄체는 외모와 가창력이 다른 자매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모차르트에게 매우 다정했다. 평범한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 베버 가족에 대한 여러 얘기와 그 집 셋째 딸 콘스탄체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잘츠부르크까지 전해졌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반대는 레오폴트에 이어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까지 태도를 굳히면서 점차 격렬해졌다. 최고의 음악가로 성공해야할 모차르트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도 포함시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들려오는 여러 소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과 걱정으로 가득 찬 조언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숙집만큼은 꼭 바꾸라고 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근심을 덜기 위해 7월 25일자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모차르트의 변명 “설령 지금 결혼해서 운이 트인다 하더라도 제 머리는 다른 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도저히 여자에게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내리신 재능은 한 여자 때문에 망쳐버린다거나 젊은 날을 하는 일 없이 지낸다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생활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이 마당에 스스로를 비참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현재로서는 그런 것은 제게 재앙입니다..... 소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깨끗한 방은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처럼 편리한 곳, 이처럼 인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은 그리 쉽사리..... 하지만 그뿐, 그밖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농담을 나눈 사람과 모두 결혼해야 한다면, 바로 200명의 아내를 갖게 되겠죠” 그리고는 항상 편지의 말미에 작곡과 연주 등 음악에 관한 구상과 아버지의 조언을 구하는 내용으로 글을 마쳤다. 콘스타체에게 청혼 1782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에게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체칠리아 부인은 생활의 협상에 노련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모차르트의 재능은 높이 샀지만 수입이 없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터였다. 만24살이 넘어야 성년이 되는데 콘스탄체는 아직 19살이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걱정이라며 콘스탄체의 집안 후견인인 요한 폰 토르바르트를 불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궁정 관료로 궁정극장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논하여 작성한 문서를 모차르트에게 보였다. 3년 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해마다 300플로린(약 1500만원: 18세기 통화환산 기준)을 위약금으로 물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계약조건은 당시 빈에서 성행하는 일이었다. 18세기 말의 유럽사회는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이상과 지성을 중시하고 사회적 합리를 추구하는 듯 한 냉정함이 세련된 행동으로 치부되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체칠리아 부인은 이미 알로이지아를 요제프 랑게에게 시집보낼 때 연간 900플로린이라는 거금을 받는 계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었다. 후견인과 체칠리아 부인은 증서를 쓰지 않으면 딸과 절대 교제를 할 수 없으니 문서로 확증해야 한다며 모차르트에게 서명을 종용했다. 이를 보고 있던 콘스탄체는 화가나 울면서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리고는 어머니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모차르트와 함께 집을 나와 버렸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후원자인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에게 콘스탄체를 데리고 가서 숙식을 부탁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계산되지 않은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랑과 철없는 듯 한 행동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청춘들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비록 노년이 되어도 남아있는 열정이다.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었다. 단테,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3대 시성(詩聖)으로 불리게 되는 무명작가 시절의 청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06)가 12주 동안 몰입하여 써내려간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럽 전역에 번역되어 베르테르는 젊은이의 열병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푸른 연미복에다 노란조끼를 입는 것이 유행했다. 연기처럼 퍼져나간 주인공의 좌절과 고독은 실연당한 남자들에게 전염되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어났다. 한 때는 책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던 이 현상은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라는 학술용어까지 만들어지며 현대에 까지 이어져 온다. 18세기 말, 유럽의 젊은이들은 왜 그토록 베르테르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당시 유럽에 번져나간 계몽주의는 신분 상승과 물질과 명예에 대한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이해타산에 가치를 크게 두는 사람도 있지만 실익이 없어 보이는 측은지심이나 보이지 않는 내면적 평안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 더 많다. 베르테르 효과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젊은이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비물질 비욕망을 통한 마음의 평화도 자극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도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진 않지만 이 베르테르 효과의 영향으로 두 사람이 공유한 순수한 마음의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괴테와 모차르트는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동 시대에 같은 유럽 내에서 살았다. 모차르트가 7살 쯤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을 할 때 14살의 괴테가 모차르트를 보았고, 훗날 그의 제자 요한 페터에커만에게 당시 어린 모차르트는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를 동경한 공통점이 있었다. 괴테보다 일곱 살이 적은 모차르트는 괴테보다 17년 먼저 1769년(13살)에 이탈리아를 1년 4개월 동안 방문했고, 괴테는 37살이 되던 해인 1786년(모차르트 30살)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괴테는 모차르트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 감독 시절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했다. 파우스트가 완간되기 전에 1790년에 단편 파우스트를 발간하면서, 파우스트가 모두 완성되어 오페라를 만든다면 오직 모차르트만이 작곡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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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컬럼] 영화 속 음악가 이야기④ 모차르트의 누나 - 영화 ‘나넬 모차르트’[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영화 ‘나넬 모차르트’ (Mozart’s Sister / Nannerl, la soeur de Mozart / 2010) 영화 ‘나넬 모차르트(Nannerl, Mozart’s Sister / Nanerl, la soeur de Mozart)’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다섯 살 위 누이인 마리아 안나 발브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를 조명한 인물 탐구 음악 영화이다. 나넬(Nannerl)은 그녀의 애칭이다. 음악과 페미니즘 ‘위대한 음악가가 모두 남성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페미니즘을 논할 때 마다 등장하는 기본 명제다. 역사를 살펴 볼 때,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차별적인 교육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음악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17세기까지도 음악교육은 남녀 간에 큰 차등이 있었다. 계층 간의 차등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신분의 차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경우는 있었다. 바로 음악가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이상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남녀의 차별은 존재했다. 나넬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Georg Leopold Mozart, 1719~1787)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맏이로 출생하였다. 자신을 포함하여 일곱 남매가 태어났지만 당시의 열악한 위생과 출산 상황에서 나넬과 볼프강만 살아남았다. 나넬도 볼프강처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딸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나넬이 일곱 살이 되자 클라비어(피아노의 전신)를 가르쳤다. 모차르트(볼프강)에게는 네 살부터 클라이버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영화의 줄거리 스스로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직업 음악가의 길을 택하여 잘츠부르크의 유명한 작곡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궁정 부악장으로 살고 있던 레오폴트(마르크 바르베 Marc Barbé 扮, 1961~)는 남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아들을 음악의 대가로 만들기 위해 딸을 반주자로 삼아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아버지 레오폴트가 두 자녀를 데리고 런던과 파리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던 1762년 말부터 1766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영화의 시작은 모차르트 남매와 두 부모가 한겨울 날씨에 마차를 타고 추위를 이겨내며 유럽 순회 연주여행을 가다가 눈길 속에서 바퀴가 고장 나서 근처 수도원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신동이라고 불리던 볼프강 모차르트(다비드 모로 David Moreau 扮, 1976~)와 그의 누나 나넬 모차르트(마리 페레 Marie Féret 扮, 1995~)는 유럽 순회공연을 하면서 음악 실력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나넬은 바이올린에 대한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바이올린은 남자의 악기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나넬에게 하프시코드(클라이버) 만을 연주하도록 강요한다. 나넬은 18세기 여성차별의 사회 구조에서 부모의 가부장적 신념에 의해 동생과 가족을 위한 헌신만을 요구 받는 처지에서도 말없이 순종하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소녀의 가슴 아픈 입장을 이어 간다. 나넬은 베르사이유 궁에서 알게 된 루이스 공주(리사 페레 Lisa Féret 분扮)의 오빠인 프랑스 황태자(클로비스 포인 Clovis Fouin 扮, 1988~)와의 만남을 통해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작곡에 대한 과거의 꿈과 억제할 수 없는 악상이 떠오름을 자각하며 자신의 재능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아버지가 볼프강에게 가르치는 작곡법을 엿들어 가며 작곡 공부를 이어간다. 파리 순회연주를 마치고 가족들이 영국으로 떠나는 날, 나넬은 엄마에게 파리에서 독립하여 음악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숙소를 나와 혼자 생활하며 작곡에 열중하여 황태자가 주문한 곡을 완성하고 실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결국 황태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한 나넬은 봉쇄 수녀원에 유폐되어 있는 루이 15세의 막내 공주 루이스가 수녀가 되기로 했다며 자신과 나눈 대화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선택이 제한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후, 나넬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쓸쓸히 가족에게 돌아가 쓰러진다. 오랜 기간 사경을 헤맨 끝에 종부성사까지 받았으나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로 간신히 살아난다. 건강을 회복한 나넬은 자신이 작곡한 모든 악보를 불태우고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르네 페레(René Féret 1945~2015) ‘나넬 모차르트’의 감독 르네 페레는 프랑스의 배우이자 작가로서, 1977년에 칸 영화제에 출품한 ‘Solemn Communion’을 비롯하여 1971년부터 201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영화를 제작ㆍ감독하였다. 특히, 40여 편의 영화에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들을 직접 영화에 출연시켜 흥행을 이끌어 낸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에 제작한 ‘나넬 모차르트’에서도 두 딸이 주연을 맡고 자신은 극중 유명 음악가로 출연하였다. 각본도 직접 썼다. 배우 수업을 위해 프랑스 북동부의 스트라스부르 국립연극학교를 마쳤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정신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였는데, 타인의 고통을 통해 겪었던 자신의 인생 경험을 주제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주변의 개인을 주제로 한 매우 독창적인 장르의 영화로 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에 영화 ‘Histoire de Paul’로 장 비고(Jean Vigo) 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감독 후기에는 역사적 예술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 작품에 몰두하여 “미묘하고 세밀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는 18세기에 쓰인 모차르트 가족들의 자료와 편지들 속에서 나넬 모차르트를 발견했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모차르트의 누나인 나넬도 볼프강에 버금가는 뛰어난 음악가였으나 당시의 시대적 불평등의 희생양으로 불운한 삶을 마쳤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 나넬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기존 배급사를 배제하고 독립적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51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쫓기면서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왕실의 실제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스탭들과 힘을 모아 궁중 장면 전체를 베르사이유궁 현지 촬영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마리 잔느 세레로(Marie-Jeanne Séréro 1966~) 페레 감독과 함께 또 하나 주목할 사람은 영화음악을 담당한 마리 잔느 세레로(Marie-Jeanne Séréro 1966~)이다. 통상적으로 음악가를 소재로 하는 음악영화에는 그 주인공 음악가가 작곡하거나 연주했던 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주인공 나넬이 작곡한 음악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가 남긴 방대한 양의 서신과 자료에도 그녀에 대한 작품이나 작곡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그녀의 작곡과 연주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칭찬한 볼프강이 쓴 다수의 편지와 자료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페레 감독은 영화음악 전곡을 새로운 창작곡으로 채우기로 결정하고 세레로 교수에게 작곡가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나넬)의 음악적 초상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세레로는 나넬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환경, 그리고 노래하는 나넬의 좌절을 상상하며 작곡을 시작했다고 한다. 115분 동안의 영화 속에서는 나넬과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바로크 풍의 음악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특히 프랑스 황태자의 요청으로 극 중 나넬이 작곡하여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은 관객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만족스러운 여운을 남겼다. 그녀는 12세에 파리 국립고등음악원(CNSMDP)에 입학하여 전문 음악의 모든 분야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고 1990년부터 그 학교의 최연소 교수가 되어 피아노, 보이스코칭, 오케스트레이션을 가르치며 유럽 전역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그녀는 당시 30여 년 동안 다양한 범위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버라이어티, 재즈, 영화 등 모든 종류의 음악 교육과 작곡을 수행하였고, 페레 감독을 만나 세 편의 영화음악을 담당하였다. 2016년에는 제10회 프랑스 영화음악상(Sacem-France Musique)을 수상했다. 여성의 재능이 무시되었던 안타까운 시대 상황 모차르트와 함께 뛰어난 작곡 능력과 피아니스트(당시의 하프시코드)로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날리며, 유럽 연주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나넬 또는 난네를)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1769년)에 아버지 레오폴트의 명령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레오폴트는 나넬의 역할이 모차르트의 빛나는 성공을 위한 조력자 이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에게조차 여성의 재능이 당연히 무시되었던 안타까운 시대 상황이었다. 그해 12월부터는 모차르트만을 데리고 연주여행을 계속했다. 나넬의 작품은 현재까지 한 곡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모차르트의 편지 중에 누나의 곡에 대한 얘기와 작품에 대한 칭찬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안 살림을 떠맡아 가족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33살이 되던 1784년에 자녀가 다섯 명인 잘츠부르크의 법관이었던 존넨베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 1736~1801)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8년 후에 남편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 음악교사로 살았지만 1825년부터 시력을 잃고 고생하다가 1829년(78살)에 사망했다. ‘좌절한 음악가 누나’를 위한 볼프강의 헌정 곡 모차르트가 누나를 위해 헌정한 곡이 있다. 나넬의 25세(1776년) 영명축일을 축하하기 위한 곡이다. 편성은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그리고 오보에와 두 대의 호른으로 이루어진 7중주곡이다. 모차르트가 남긴 가장 밝고 경쾌한 곡 중의 하나다. 이 디베르디멘토는 여섯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Mozart Diverimento No. 11 in D Major K.251 ‘Nannerl Septett’ (모차르트 디베르디멘토 제11번 라장조 K.251 ‘나넬7중주’) I. Allegro molto 4/4 (4:27) II. Menuetto 3/4 (4:33) III. Andantino 2/4 (4:30) IV. Menuetto-Tema con variazioni 3/4 (4:25) V. Rondo-Allegro assai 2/4 (4:50) VI. Marcia alla francese 2/4 (2:10) ‘Nannerl Septett’ (나넬7중주)는 ‘음악천재 남매’라는 찬사를 들으며 화려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도전을 포기하고 쓸쓸히 여성의 고난을 감내해야 했던 나넬을 위한 곡으로 모차르트의 따뜻한 위안이 흠뻑 묻어나는 곡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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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㉗ 오페라 '후궁탈출' K.384[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오페라 '후궁으로부터 탈출(후궁탈출)' K. 384 1782년(모차르트 26살), 새해가 밝아오자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와 가진 피아노 경연으로 멈추었던 오페라 ‘후궁탈출’의 완성에 몰두했다. 모차르트는 황제 요제프2세의 명령으로 작년(1781년) 7월 30일에 극작가 스테파니(J. Gottlieb Stephanie, 1741~1800)로부터 라이프치히 출신의 극작가 브레츠너(C. F. Bretzner, 1748~1807)의 원본을 각색한 대본을 받아 독일어 그랜드 오페라 ‘후궁탈출’을 작곡하고 있었다. 계몽군주 요제프2세 황제는 빈에서 유행하는 오페라가 이탈리아 대본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입장의 예술적 야망을 가지고 독일어 오페라 징슈필(German Opera, National Singspiel)을 장려하고 있었다. 모차르트 자신도 모든 오페라를 이탈리아 대본으로 작곡하면서 독일어 오페라를 만드는 것을 소중한 꿈으로 바라고 있던 차에 황제의 요청을 받자 이를 신의 섭리로 여기며 기쁘게 작업을 시작하였다. 음악과 함께 하는 오페라 “후궁으로부터 탈출(후궁탈출)” 줄거리 '후궁탈출 서곡(Mozart Overture Seraglio k.384)' Presto C장조 2/2박자-Andante c단조 3/8박자-Presto C장조 2/2박자 후궁탈출의 내용은 오스만튀르크(튀르키예, 터키)에 대한 부정적이고 야만적인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통해 튀르키예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오페라의 출발도 스페인의 귀족 벨몬테(Belmonte)의 약혼녀인 영국 귀족의 딸 콘스탄체(Konstanze)가 해적에게 납치되어 하인들과 함께 튀르키예 권력자 파샤 셀림(Pasha Selim)의 궁전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1막과 3막에서 파샤 셀림이 등장할 때 나오는 '예니체리 합창(Bassa selim lebe lange)'' 다행히 스페인 태생의 기독교인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파샤 셀림은 노예들을 그나마 해변 궁전에서 견딜 수 있는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가 콘스탄체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한다. 하지만 이미 연인 벨몬트에게 사랑을 맹세한 그녀는 파샤 셀림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은 가지지만 그의 사랑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2막에서 파샤 셀림은 자신의 사랑을 냉정하게 거부하는 콘스탄체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고 선포하지만 콘스탄체는 ‘차라리 죽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자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로 가장 고통스럽게 고문하겠다’고 협박한다. 이 때 콘스탄체가 부르는 아리아가 후궁탈출의 중심 곡인 '어떠한 형벌이 가해지더라도(Martern aller Arten)'이다. '아리아, 어떠한 형벌이 가해지더라도(Aria, Martern aller Arten)' 어떤 고문이 기다린다 해도 나는 웃어 주리라 어떤 고통도 아픔도 나를 흔들 수는 없으리 오직 진실과 함께 할 때 두려울 것이 어디 있으랴 어떤 무서운 명령이든 내리세요 미친 듯이 협박하고 처벌하세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저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이 곡은 가사가 고문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노래하는 가수에게도 고문에 가까운 고난도의 콜로라투라(coloratura) 창법을 구사해야하는 어려운 곡이어서 ‘고문의 아리아’라고 불린다. 전주곡도 2분 정도로 길고 총 9분여가 소요되는 긴 아리아이다. 콘스탄체의 단호하면서도 순결이 묻어나는 지순한 사랑을 노래하는 콘스탄체의 아리아에 감동한 파샤 셀림이지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은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불타오른다. 콘스탄체의 연인 벨몬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들어와 건축기사로 위장하여 후궁으로 잠입하고 계획대로 일행을 구출하여 탈출을 시도하지만 경비대장 오스민(Osmin)에게 붙잡혀 파샤 셀림 앞으로 끌려 나온다. 벨몬테는 자신이 오란의 사령관 로스타도스의 아들로서 큰 몸값을 내겠으니 풀어달라고 간청하지만 오히려 원수인 로스타도스의 아들이니 더욱 살려둘 수 없다고 단언하고 파샤 셀림이 퇴장하자 두 사람은 함께 죽을 수 있어 행복하다며 손을 맞잡고 노래한다. '파샤 셀림 만세! (Bassa Selim lebe lange!)' 반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하인 페드리요와 블론테는 자포자기하고 벨몬테와 콘스탄체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을 때 다시 나타난 파샤 셀림은 '복수처럼 추한 것은 없다'라고 하며 네 사람에게 배를 타고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 힘을 가진 자가 한 걸음 물러나자 태산 같은 갈등이 무너지고 평화가 펼쳐졌다. 경비대장 오스만이 분개하지만 평화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권력자 파샤 셀림의 은덕을 찬양하면서 '파샤 셀림 만세'가 울려 퍼진다. 오페라 속 스토리의 내용은 유럽은 문명이지만 튀르키예는 야만이라는 구분을 관철하기 위해 파샤 셀림을 스페인 태생의 기독교인에서 나중에 무슬림으로 개종한 권력자라고 설정을 넣어 언제나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유럽사회의 이분법적 사고를 유지하며 종결 시킨다. 대본의 시각이 너무나 진부하여 오히려 흥미롭다. '후궁탈출'의 사건 내용과 모차르트의 현실 사연의 우연한 일치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탈출'의 특징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후궁탈출의 콘스탄체는 그 해 8월 4일에 모차르트와 결혼하게 되는 실제의 예비신부 콘스탄체와 오버랩된다. 이 작품은 너무나 우연하게도 바로 모차르트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작품처럼 보인다. 1781년부터 모차르트는 자유음악가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 그리고 모차르트가 빈에서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는 기존 세력들의 벽에 막힌 모차르트가 겪고 있는 현실이 후궁탈출 속의 벨몬테의 아픔과 일치한다. 벨몬테와 콘스탄체의 고난은 모차르트와 예비신부 콘스탄체의 고난이었고, 이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축복해주는 극중의 파샤 셀림은 모차르트가 소망하는 아버지 레오폴트에 대한 모차르트의 희망회로가 되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