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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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처분 등의 행위에 대한 불복절차 소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의뢰인과 수임인으로 만난 한 분과 이야기를 하던 중 자신 또한 공무원 출신으로 공무원 퇴직 후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를 상대로한 민원 및 진정에 대해서 정말로 현 공무원들의 답답한 자세와 행위에 대해 성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의뢰인은 자신은 퇴직 후 농업에 전념하면서 지방자치 단체나 공공기업의 잘못된 사업시행으로 인해 한때 자신이 몸 담았던 지방자치 단체에 말하면 되겠지 생각하여 찾아갔지만, 담당공무원의 불통적인 자세에 '나도 이랬나?' 싶어서 자신의 과거 공무원 생활을 돌이켜 보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들은 필자 또한 과거에 민원인을 상대로한 불통의 자세가 없었는지 한참동안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정부 및 지방자치 단체의 행정처분, 민원 처리, 고충해결 등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잠시나마 설명드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앞서 필자가 쓴 사설에서 정비 및 지방자치단체는 국민 및 시민의 위법행위에 대해 형사처벌 고발조치와 행정처분이라는 기속력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설명 드린바 있습니다. 형사 처벌이야 관계법령상 위법사항에 대해 형법 및 특례법을 위반으로한 수사기관에 의뢰하여 형의 선고를 이끄는 부분이 있어 제가 일일이 어떠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정부 및 지방자치 단체에서의 행정처분은 관련법 위반에 있어서 행정처분을 적용하기위해서는 행정처분의 바이블이 되고 있는 '행정절차법' 에 따라 처분절차를 지켜야 합니다. '행정절차법' 에서는 국민을 기속하기 위한 행정처분은 충분한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행정청에서 행정처분 절차를 절차법에 의해 진행시켜야 하며, 처분 이전에 충분한 의견을 수렴(행정절차법 제21조) 해야 한다고 규정하여 혹시 모를 국민의 정당한 사유를 수렴하게 하고 있습니다. 최초 '행정절차법' 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난 후 행정청 소속 공무원들도 이법을 적용하지 않는 상태로 행정처분을 시행하여 위법한 행정처분이라는 사례와 판결을 통해 오명을 발생시켰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행정청 스스로가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행정처분에 대해 하자와 흠결이 있는 경우는 행정심판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겠지만, 정작 행정청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고충 및 민원발생 시 행정청이 불통의 자세를 가진다면 이를 쉽게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필자 또한 어떠한 사항에 대해 행정청의 잘 못이 명확하지만, 이를 해결해 달라고 민원신청 하였지만, 행정청 입장에서 '우리는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였으니, 문제점이 없다' 라는 답변을 들을 때 '이 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라는 고민에 쌓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필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 또한 다채로운 각도에서 시도를 하고 있지만, 통상의 일반인 경우는 해결이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대한 해결사항으로 우리나라의 제도에서는 여러 가지의 고충신청 제도가 있습니다. 짧게 고충해결 제도를 설명드릴 것이니 행정청과의 문제 발생 시 적용하여 조치하시면 될 것으로 판단되니 이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고충해결 제도는 4가지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크게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도 주민감사위원회, 지방자치단체 감사위원회 등으로 고충해결 제도가 구분되며, 지방자치단체 감사위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고충해결 제도는 실제 행정청의 민원처리에 대해 평가를 하여 문책 등의 조치 시행이 가능하오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기의 고충해결 기관에서는 구두보다는 서면을 통해 민원을 접수받고 있으며, 접수받은 민원에 대해서는 접수→사실조사→검토→조치 등의 단계절차에 의해 조속한 시간 내에 조치 답변 등을 서면으로 받을 수 있으니, 항고재송의 절차보다 짧아 시한성을 요한는 사항에 대해 처리가 가능하오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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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이야기⑨ 제3차 이탈리아 여행 – '질풍노도 (Strum und Drang) 운동[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콜로레도 백작, 잘츠부르크 대주교 취임 1772년(16살) 3월 14일 콜로레도 백작(Hieronymus Graf von Colloredo,1732~1812)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 취임했다. 전임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서거한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모차르트는 5월 초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단막 오페라 '시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을 헌정하고 오페라의 합창 일부와 아리아를 연주하여 취임을 축하하였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8월 21일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 유급 궁정악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2년 전에 밀라노 왕립극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사육제를 위한 오페라 '루시오 실라(Lucio Silla K.135)' 초연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모차르트 부자의 이탈리아 여행을 허락했다. 밀라노에서의 음악적 성공은 바로 잘츠부르크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밀라노 왕립극장에서 오페라 '루시오 실라' 초연 모차르트 부자는 10월 24일 잘츠부르크를 출발하여 11월 4일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에게는 이번 여행이 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밀라노는 모차르트에게 최초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마차에서 내린 모차르트의 손에는 여전히 미완성의 악보만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완성된 대본은 아직 받아 보지 못했다. 빈의 궁정시인 조바니 데 가메라(Giovanni de Gamerra 1742~1803)가 쓴 대본에 의한 레치타티보는 마쳤지만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가 수정하여 완성한 대본은 밀라노에 도착할 때까지도 받을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이런 식으로 늘 임박해서야 완성되었다. 12월 18일에 악보로 옮겨져 연습에 들어간 오페라 '루시오 실라' 는 1772년 12월 26일 몹시 춥던 겨울 저녁에 지휘대에 올라 선 모차르트를 또 다시 두 시간 동안을 기다리게 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막간과 휴식 다음에 발레를 넣었기 때문에 여섯 시간이 소요된 공연은 다음날 새벽 2시에 막을 내렸다. 쉬지 않는 열정적인 작곡 모차르트는 밀라노에 도착하여 '루시오 실라' 작곡에 쫓기면서도 틈틈이 '밀라노 4중주' 와 모테트(Motet 르네상스 시대 성악곡의 하나)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K.165)'를 작곡했다. 그리고 3차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던 1772년부터 1773년까지 '여섯 곡의 현악 4중주곡(K.155~160)' 을 써 내려갔다. 연주회를 마치고 모차르트 부자는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내려갔다. 테레지아 황후의 냉정한 표정에서 읽은 황후의 자신에 대한 의중과 많은 사람의 따돌림이 느껴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일자리를 위해 최후의 방문자로 토스카나의 레오폴트(Leopld ll 1747~1792) 대공을 찾아간 것이었다. 대공의 부인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 1745~1792)였는데 공주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페라 '루시오 실라' 연주회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희망사항이 무위로 끝난 허무한 결과를 안고 모차르트와 레오폴트는 1773년(17살) 3월 13일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음악적 성과 집으로 돌아 온 모차르트는 여행의 시간을 멈추고 약 4년 여 동안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다. 모든 실망감을 훌훌 털고 작곡에 몰두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와 레오폴트 부자가 그동안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돌며 명성을 얻었던 것은 잘츠부르크의 제후를 겸하는 대주교의 위상을 드높이고 돌아온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적인 수확을 거두어 들일 시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모차르트에게 대주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도록 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과 성당, 극장용 기악곡과 합창곡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1773년의 9개월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7곡과 현악 4중주곡 6곡, 현악 5중주곡 1곡, 디베르디멘토 4곡, 관현악 무곡 16곡, 미사곡 1곡 등의 훌륭한 작품들을 계속 작곡했다. 1774년(18살)에 이르러서는 교향곡만 해도 열네 곡이 작곡되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시작된 작곡의 양과 속도가 보여 준 엄청난 생산력으로 드러난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진행되었던 유럽과 이탈리아에서의 연주여행의 본격적 음악성과가 비로소 표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풍노도 운동’과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레오폴트는 1773년 가을, 잘츠부르크에서 오늘날 마카르트프라츠(Makartplatz)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던 ‘무용교습소’를 인수했다. 8개의 방과 넓은 홀이 있는 크고 깨끗한 이 건물에는 정원도 딸려 있고 여름철 휴식은 물론 작곡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얼마의 기간 동안 모차르트의 가족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주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을 꼽는다면 그 곡은 바로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일 것이다. 모차르트 연구자들은 '교향곡 g단조 K.183' 을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영향으로 설명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일어난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등이 주창한 질풍노도 운동을 모차르트가 빈에서 배워 와 불타 올랐던 정열과 염세적 기분을 격하게 표현했다고 분석했다. 모차르트는 1773년 7월에 만난 레싱의 친구 토비아스 게블러(Tobias Gebler 1726~1786)의 대본으로 오페라 '이집트 왕 타모스(Thamos, Konig in Agypten K.345)' 를 작곡하며 ‘질풍노도’ 를 체험하고 인간의 자유를 질식케 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젊은이로 변모했다. (오페라의 흥행은 실패했지만) 콜로레도 대주교의 개혁조치 콜로레도 대주교는 13세기부터 여러 군주와 추기경, 대주교가 나온 귀족가문 출신으로 주변의 인맥과 추진력이 대단했다. 특히 긴축 정책으로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요제프 2세 황제와 노선을 같이하는 입장에서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대성당, 궁전, 대학극장 등에 집중되었던 음악연주를 대성당으로 축소하고 궁전극단은 폐쇄하였다. 극장은 주로 순회극단의 공연으로 대체했다.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성당 장식과 전례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미사 시간도 45분으로 제한하여 음악연주는 20분 이내의 짧은 미사곡이어야 했다. 장엄미사곡과 긴 미사곡에 의미를 두고 작곡해 왔던 모차르트에게는 견디기 힘든 조치였다. '교향곡 25번' 이후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자기보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적 소명을 자각하고 오페라 작곡가로 나아 가겠다고 하는 꿈을 굳혔다. 이 작은 도시에 자신을 가두는 것은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꿈은 오페가 극장이 없는 잘츠부르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은 점점 언젠가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트를 떠나야만 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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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법칙을 알아야 할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자본주의 (資本主義) 란 말은 표준국어 대사전에 경제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경제체체라로 정의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사무실, 도로 등 인간의 만든 것에는 자본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아파트를 분양을 받는때는 대부분 장기대출금을 받아서 아파트를 구입하게 된다. 대출금을 갚을 기간 동안 아파트 가격이 오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출을 받아서 샀지만 만약 대출금을 갚을 기간동안 아파트 가격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 앞으로 대출받아 아파트를 살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모든 것이 자본이란 것으로 가치평가가 되어 거래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년 간 소비하는 비용보다 수익이 적으면 외부로부터 자본을 빌려와야 되며 정해진 기간에 갚지 못할 경우 파산을 신청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을 사용했다면 그 자본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개인이나 기업은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또한 자본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자한 자본을 잃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부의 인문학(저자 우석)이란 책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 게임을 법칙을 익혀라' 라고 소개하고 있다. 첫째, 금본위 화폐가 사라지면서 환율이 태어난 것이다. -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신용화폐가 등장함에 따라 금과 같은 보증없이 그냥 정부의 약속으로 찍어내는 돈이 된것이다. 둘째, 돈의 가치와 부동산의 가치, 어느 쪽이 먼저 떨어질까? - 정부는 경제가 침체될때 마다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내게 된다. 돈을 많이 찍으면 인플레어션이 오게 되는데, 이런 시스템하에서는 돈을 빌린 사람이 득을 보게 된다. - 돈을 빌려서 실물자산인 부동산에 투자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빚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셋째, 빛이 많아질수록 돈이 더 많이 생긴다? -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 채권을 받고 돈을 준다. 정부는 그 돈으로 도로, 지하철, 공무원임금, 복지등으로 사용한다. - 기업이나 개인은 돈을 벌면 은행에 맡기고 은행은 대출을 해주고 또 은행에 돈을 맡기고 대출을 해준다. - 결국 돈은 빚으로 생겨난다. 빚이 많이 발생할수록 돈이 더 많이 생겨난다. 나중에 돈이 많아지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인플레이션이 생기게 된다. 넷째. 가짜 돈에 목매지 말고 리얼머니를 보유하라. - 가짜 돈인 화폐를 모으려 하지말고 진짜 돈인 리얼머니를 보유해야 한다. 그게 부동산이고 주식이다. - 주식이나 부동산같은 자산은 상승과 하락 사이클을 몇 년간 그리면서 우상향한다. - 바닥이라고 생각될때 빚을 얻어서 투자하는게 최고로 빨리 재산을 늘리는 첩경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거래하는 시대이니 만큼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도 거래를 할 수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그래서 시간은 소중하고 가치가 있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 40시간을 일하고 그에 댓가로 돈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가치있게 활용하여 수익을 내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을 저당잡히게 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오늘 주어진 24시간을 가치있게 활용하여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 에티쉬는 용변 중에 발생하는 냄새ㆍ바이러스ㆍ세균을 없애주는 제품으로 한 번 설치로 소모품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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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제주도립예술단 합동공연: 문화정책 '팔길이 원칙'[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서; 제주도립예술단 합동공연 ‘애랑이넘실’ 지난달 7월 ‘애랑이 넘실’의 제목으로 제주도립예술단 합동공연이 제주도문예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마침 코로나 사태가 안정화 되어 가는 시기였고 흔치 않은 제주도립예술단 합동공연이었기에 오래 간만에 꽉찬 객석을 마주 할 수 있어 마음이 흐뭇하였다. 공연은 종합예술극으로, 정통적인 무대와 연출보다는 다양하면서도 시각효과와 음향을 살린 융ㆍ복합 공연의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제주도립예술단 30여 년의 역사상 이렇게 획기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무대는 그동안 없었다. 기존의 무대를 오케스트라 피트와 관객의 객석을 활용하면서 무대 자체를 변형ㆍ확장하였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배치 또한 대각선으로 배치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시각적, 음향적인 효과까지 감안 적용하여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전환케 하였다. 그것은 김태욱 감독의 무대 구성과 예술적 감각, 김혜림 총감독의 연출, 그리고 무용단을 중심으로 무대를 현실화 한 공연철학과 연출의 통찰력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또한, 고루하였던 원작 ‘배비장전-애랑이 보러 옵데가’를 현대적 감각에 맞추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대본을 만들어낸 강보람 작가의 예술적 감각과 연출부와의 완벽한 앙상블은 우리나라 최고의 글쓰기 이야기꾼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전통적 음악배경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 접목한 홍동기와 박영란 작곡가의 음악적 감각은 외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또한 특별출연으로 극의 재미를 한층 더한 최종원 배우의 연기는 다음 공연을 기대하기에 충분하였다. 김태욱 감독과 강보람 작가, 김혜림 감독의 예술적인 교류와 앙상블은 이미 강원도 평창문화올림픽과 우리나라의 굵직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과 국제규모의 이벤트에서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었기에 이런 혁신적 무대와 연출이 탄생한 듯 하였다. 특히, 제주 출신의 김태욱 감독은 2018 평창 문화올림픽, 2019 대한민국 문화의 달,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폐회식, 제주세계유산축전 등 정부의 주요 행사에 감독 및 연출로 참여한 최고의 실력자이다. 본; 제주도립예술단의 과제와 방향 제주도립예술예술단은 제주도내에서 가장 전문적이면서도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립예술 단체이다. 총 5개 단체 약 270명이 활동하면서 매해 약 13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 음악 분야가 4개 단체(제주교향악단, 제주합창단, 서귀포관악단, 서귀포합창단)이고 1개의 무용단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음악 분야가 많은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공립예술 단체에 특장화가 되지 않은 유사 합창단이 2개인 점, 관악단의 보편성이 미흡한 점, 연극단과 국악단이 없다는 점은 글로벌 제주가 문화예술의 섬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이는 전국의 공립예술단을 볼 때에도 매우 이질적이며, 제주도립예술단 구성과 편성이 비효율적인 상황으로 문화예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새로운 예술단체의 창단운영과 각 단체의 특장화가 꼭 필요하다. 2019년에 발표된 문순덕ㆍ홍선영의 연구 (제주연구원, 제주지역 공공 공연장 및 예술단 전문인력 확보방안) 에서도 제주도립예술단의 각 단체별 특성화를 주문하면서 예술단과 상주하는 공립문화 예술공간의 효율적인 상호협력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관련 연구와 언론 보도자료에 의하면 제주를 대표하는 전문 공립문화 예술공간인 제주도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 서귀포예술의전당에 예술단의 상주 및 전속단체 시스템을 적용하여 약점은 보완하고 강점은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현재, 제주의 예술공간과 예술단의 운영시스템은 전문가 중심의 운영이 아닌 행정이 직영하면서 공무원이 지도, 관리, 감독하고 있는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그 대안으로 서울이나 광역시의 사례를 들며 법인으로 전환하여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연구에서는 법인 전환이 곤란한 경우 행정소속으로 운영하되 전문가 영입과 전문가 조직을 적용하면서 행정과 전문가 조직이 혼합된 거버넌스 예술기관단체 시스템으로 운영을 권장하고 있다. 결; 문화정책 및 예술행정의 과제 제주도립예술단 4년 차 합동공연은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행정과 공연을 만들어 낸 제작진들과의 불협화음과 전문 분야에서의 아쉬움의 소리도 들렸다. 무리하게 무대를 확장하면서 생긴 무용단의 움직임과 춤 장면에서 무대의 찌그덕하는 소음, 그리고 2층에서 관람 시 무대의 앞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 무용단의 연기는 좋았으나 대사가 거의 없기에 극의 상황 전개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 좋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사운드였지만 음악이 유사하고 단조로웠던 점 등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행정이 예술단을 원활하게 운영하지 못하면서 제작진들은 무대연습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하였다. 특히, 공연 후 커튼콜에서 박수를 받아야 할 제작진과 예술가들의 무대에서 맨 마지막 인사를 도청 행정공무원이 했다는 점은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몇몇 예술가들은 도지사가 와서 인사를 해도 못마땅한 상황에 도청 과장이 모두를 대신하여 마지막 커튼콜을 받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반드시 고쳐야 할 점으로 이후에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안된다. 마지막 무대인사 또한 공연의 일부이고 관객이 퇴장 후에야 공연이 종료되는 것이다. 행정의 역할은 공연이 성공적으로 종료 될수 있도록 재원과 인력과 조직을 지원하고 작품은 예술가에게 맡겨 두어야 한다. 수 년 동안 대규모 예산을 들이고 행정에서 제작하여 공연하였던 작품들을 살펴 보아야한다. 그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작품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작 후에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어떻게 상품화하여 상설공연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연될 것인지 바로 이것이 행정이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핵심과제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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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심사숙고 해야 한다[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심사숙고' 란 국어 사전적 의미로 깊이 잘 생각함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풀이해서 말하면 현실을 깊이 잘 생각해서 계획해야 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오늘 필자가 왜 이런 사자성어를 말씀드리면서 컬럼을 시작하는 이유는 최근 이 '심사숙고'란 단어를 하지 않은 채 근거없이 자신만의 철학으로 행정처분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설명을 드리고 사설을 시작하는 겁니다. 최근 행정처분으로 인해 고충에 시달리시던 의뢰인 한 분이 찾아와 자신이 소유 토지 중 논으로 사용하던 토지를 성토 (흙을 쌍아 올리는 것으로 부지조성, 제방쌓기 등을 다른 지역의 흙을 운반하여 지반 위에 쌓는 것) 하면서 인접하였던 하천 지목의 본인 소유토지 또한 성토를 하였으며, 논 농사를 짓기 위한 면적이 작아 밭 농사를 짓고 싶어서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토 중 공사작업을 발견한 인근 주민이 민원을 넣어 지방자치 단체에서 나와 실사를 한 후 원상회복을 계고 하였고 일정기간 이후에 원상회복이 안되면 과태료 및 형사고발 조치를 하겠다는 안내문을 접수하여 급한 마음에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 주셨습니다. 토지의 형질변경 즉, 토지를 절토ㆍ성토ㆍ정지ㆍ포장 등의 방법으로 토지의 형상을 변경하는 행위를 할 경우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이하 ‘국계법’이라 한다.) 에 의거 지방자치 단체로부터 허가를 득한 후 토지의 형질변경 공사를 시행하는 것은 맞으나, 경작을 위해 전에서 답으로 바꾸거나, 답에서 전으로 바꾸는 행위는 허가없이 시행할 수 있음을 설명드렸습니다. 이 사항에 대해 실사를 나온 담당 공무원에게 설명을 하였지만, 담당 공무원은 농지의 경우는 '국계법' 위반에 해당이 없으나, 하천의 경우는 불법이라고 하여 원상회복의 계고와 3일 후 형사고발 조치를 하였다고 하여 답답함 마음에 필자를 찾아온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모법에서 나온 규정만을 해석한 사례로 다시 한 번 설명드렸습니다. 국토교통부령 제1375호 개발행위 허가 운영지침 제 56조 제2항 제2호에 따라 '절토ㆍ성토ㆍ정지ㆍ포장 등의 방법으로 토지 형상을 변경하는 행위와 공유수면 매립은 개발행위 허가 기준에서 제외된다.' 규정을 설명드렸으며, 공유수면이라함은 바다, 바닷가, 하천ㆍ호소ㆍ구거 등이 '공유수면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에 특정되어 있음을 설명드린 후 해당 관계사항에 대해 의견서를 작성하여 지방자치단체 제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수 일 후 의뢰인은 '감사하고 잘 해결되었다.'라고 연락을 하셨으며, 필자 또한 매우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위 사례를 참조하여 볼 때 재량적 처분을 하는 지방자치단체 소속된 공무원이 약간의 지침과 타 법을 숙독하였더라면 이번 사건의 의뢰인과 같은 국민에게 고충이 발생되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여 항상 기속력 있는 처분을 하는 행정청의 담당자는 상시 '심사숙고'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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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⑧ 제2차 이탈리아 여행 – 성공 뒤의 좌절[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1771년 3월, 이탈리아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징슈필 '베툴리아의 해방(La Betulia liberata, K.118/74c)'을 작곡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차르트는 어느 날 오스트리아 궁정으로부터 중요한 연락을 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의 셋째 아들인 롬바르디아 총독 페르디난트 공작(1754~1806)과 모데나 공주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세레나타’ 작곡 의뢰였다. 결혼축제는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이 결혼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호화로운 축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축하 오페라(opera)와 세레나타(serenata)를 각각 최고의 작곡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페라 '루지에로(Il Ruggiero)'의 작곡은 대작곡가 하세(J. A. Hasse, 1699~1783)에게, 대본은 궁정시인 메타스타시오(P. Metastasio, 1698~1782)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는 모차르트와 계몽주의 시인 주세페 파리니(G. Parini, 1729~1799)에게 작곡과 대본을 주문했다. 교황청의 훈장을 받고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회원이 된 후 오스트리아 왕실의 정치적 명예가 걸린 결혼 축제에서 큰 역할까지 맡은 모차르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멋진 곡을 쓰려고 작정한 모차르트는 서둘러 작곡을 시작하려 하였지만 궁정의 검열 때문에 대본이 계속 늦어졌다. 날짜가 임박해지자 대본 없이 서곡만 완성한 채로 모차르트 부자는 8월 13일에 밀라노로 출발했다. 밀라노에 도착한 8월 21일에도 대본은 오지 않았고, 8월 29일이 되어서야 대본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미친 듯이 작곡에 몰두했다. 날이 갈수록 개인기가 충실해지는 모차르트에게 쫓기는 시간은 도리어 자신의 진가가 드러나는 기회가 될 뿐이었다. 작곡을 하면서 동시에 합창을 연습시키고 솔로 가수들이 도착할 때마다 신속하게 독창부분까지 완성하며 20여 일 만에 세레나타를 완성하였다. 리허설은 9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오페라와 세레나타는 같은 날에 공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세레나타는 오페라를 위한 보조적 역할로서 서막으로 연주되거나 궁정 연회의 마무리를 위해 저녁에 여흥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곡 모두 최고의 작곡가와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는 연주회였기에 국민들의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결혼식은 10월 15일이었다. 그래서 하세의 오페라 '루지에로'는 10월 16일에,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는 10월 17일에 각각 공연키로 결정되었다.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다음 날부터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전날에 공연한 하세의 오페라는 관객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 반면에 모차르트가 지휘하고 카스트라토 조반니 만추올리(G. Manzuoli, 1720~1782)가 주인공 아스카니오 역을 맡은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인기 카스트라토 만추올리와 명성이 드높아진 천재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관중이 몰려들었고 멋진 음악에 열광했다. 결혼 축제기간 동안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는 다섯 차례나 연주되었다. 공연에 참석하여 훌륭한 연주에 감탄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은 레오폴트에게 “여제께 청원하여 모차르트에게 빈 궁정 산하에 종신직 작곡가 자리를 하사 하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보다 두 살이 많은 대공은 어렸을 적에 모차르트가 쇤부룬에서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앞으로 곁에 두고 촉망받는 음악가의 장래를 보장해주려고 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레오폴트는 흥분하여 모차르트가 곧 직책을 맡게 될 것이고 궁정 작곡가 하세와의 경쟁에서도 이겼다고 소문을 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대공은 약속대로 모차르트에게 직책을 주고자 하는 청원 편지를 빈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께 보냈다. 1771년 12월 12일, 밀라노에 있는 대공에게 여제로부터 답장이 왔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깜짝 놀랐다. 여제가 아들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는 레오폴트 부자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견해와 결론이 적혀 있었다. - 젊은 잘츠부르크인이 너를 섬기도록 해도 좋을지 의견을 물었지. 네가 왜 쓸모없는 작곡가를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게 즐거움을 준다면 굳이 막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직책을 주는 것만은 막고 싶구나. 그들은 거지처럼 세상을 떠돌아 다닌단다. 그런 사람들이 너를 섬긴다면 결국 황실의 품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게다가 그에겐 먹여 살릴 가족도 많다는구나. - 성공가도를 달리던 모차르트에게 좌절이 다가왔다.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실권자에 의해 앞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을 알지 못했다. 여제는 한 때 모차르트를 귀여워 하여 황태자의 예복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768년 빈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바보 아가씨'의 공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아플리지오의 횡포에 대해 레오폴트가 요제프 2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한 사건을 두고 여제가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인정했던 하세도 레오폴트에 대해서는 '그는 어디서나 불만을 드러내고 아들을 지나치게 우상화하여 자칫 아들을 망칠 수도 있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세는 여제가 어렸을 때부터 총애하던 신하이자 존경하는 음악가였다. 하세의 오페라 공연 실패도 여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여제의 변심은 레오폴트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며칠을 기다려도 페르디난트 대공으로부터 답신을 받지 못한 모차르트 부자는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12월 15일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좌절은 겹쳐지고 있었다. 고향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슈라텐바흐(Sigismund von Schrattenbach, 1698~1771) 대주교가 중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인 12월 16일,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서거했다. 모차르트 일가에게 호의적이었고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아들과의 장기간 유급여행을 허락해 주어 현재의 모차르트로 성공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도와준 후원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듬해 1772년 1월 27일, 모차르트는 16살이 되었다. 레오폴트는 토스카나 공국의 레오폴트2세에게도 모차르트의 거취를 청원했다. 레오폴트2세 대공도 마찬가지로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이었다. 1773년 2월, 토스카나 공국에서도 거절한다는 답변이 왔다.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의 궁정에 직책을 가질 기회는 없어진 것이었다. '문명화 과정' 을 쓴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1990)는 모차르트 부자가 1762년부터 유럽 전 지역과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연주여행을 마친 1773년까지의 시기를 ‘모차르트의 수련기간’으로 구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천부적 자질로 유명해진 신동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힘들고 거친 수련의 시간을 거쳐서 노력 끝에 쟁취한 음악성을 갖춘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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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나도 성공할 수 있을까?[전문가 컬럼]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전주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2006년부터 매니저 근무하면서 창업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았다. 창업기업은 어느정도 사업에 성공하면 자사의 건물을 짓기 위해 부동산을 사고 회사를 확장하게 된다. 또한 개인도 대부분 돈을 벌어 처음은 부동산을 사고, 다음은 지속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투자를 하게 된다. 창업기업이나 개인이나 성공의 기준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부의창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나도 성공할 수 있을까?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성장한 매니저나 성공한 창업기업을 만나본 결과 느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나 최고기업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좀더 개선해 나가야 한다. 둘째,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의 트렌드를 알고 남들보다 먼저 진입하여 일을 추진해 나간다. 2008년 5월경 태양광발전을 하는 기업이 입주하여 대표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분야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한전에서 전기를 사주는 사업은 개인에게는 연금과 다름없으니 꼭 태양광발전소를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 왜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때는 기회를 놓쳤지만 다음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금리인상 및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시기이지만 위기에는 항상 기회가 함께하는 것 같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먼저 알고, 중요한 것은 좀 더 빠르게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 셋째,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다면 시장에 겸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공했다면 성공한 이유가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말고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공했다는 겸소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항상 초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넷째, 절제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절제의 성공학(미즈노 남보쿠지음)의 글을 인용하면 한때 가업을 크게 일으켰으나, 지금은 거의 망할 지경입니다.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습니까? 당신은 원래 복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상도 크게 좋아 자손에게도 큰 재물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음식을 절제하지 않아 하늘로부터 받은 복을 조금씩 줄여 왔습니다. 하지만 가운이 다해 망할 지경에 있어도 주인이 식사를 줄이고 엄격히 절제하면 다시 번성할 수 있습니다. 가운이 다 했어도 주인이 절제하고 정신을 차리면 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가업이 망하는 것은 주인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망하게 된 것이지 다른 탓은 없습니다. 모름지기 그 집의 천록이 다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주인이 스스로 식사를 줄여서 이것을 천지에 베풀면 가운이 저절로 살아납니다. 천록이 온전하면 집안이 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폭식과 과식은 항상 천복을 줄이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폭식과 과식을 삼가세요. 음식은 모두 하늘에서 받았다는 뜻으로 천록이라고도 합니다. 절제를 할 수 있어야 성공을 유지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섯째, 목표는 가장 달성하기 쉬운 목표부터 정해야 한다. 큰 목표를 정하고 나면 바로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내일로 미루기 마련이다. 아주 간단히 쉽게 달성 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면 쉽게 할 수 있고 조금씩 조금씩 반복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큰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 같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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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무용예술과 문화예술의 섬 제주: 발레와 지역문화 활성화[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대한민국발레축제 IN 제주 포럼 제주에서의 발레장르는 흔치않을 뿐 아니라 그 역사조차 전무후무하여 가장 열악한 예술 분야의 하나이다. 무용 분야 또한 한국전쟁 이후 제주여자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중등학교에서의 전통무용 중심의 예술교육에서부터 출발하였기에 발레 분야는 제주무용의 역사에서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중에 서울 예술의전당과 대한민국발레축제추진단이 협업하여 도내ㆍ외 무용 및 발레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제주포럼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스페셜 발레갈라 공연’ 과 함께 '무용예술과 문화예술의 섬 제주-발레를 통한 제주 지역문화 활성화 방안 모색' 을 주제로 진행되었고, 포럼의 사회는 대한민국발레축제 조직위원인 문 영 국민대학교 교수가 맡았다. 발제는 장광열 숙명여대 무용과 겸임교수, 필자 (김태관 제주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와 정옥희 비평가가 맡았고, 장광열 교수의 발제1섹션에서는 기은주 탄츠하우스인제주 대표, 박수현 제주무용교육가, 이소현 문화기획자, 최길복 대한무용협회 제주도 지회장이 참여하여 ‘무용예술을 통한 문화도시 제주의 경쟁력’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김태관 교수의 발제2섹션에서는 강경모 제주유산축전 총감독, 김하월 대한무용협회 서귀포지부장, 손민호 전 국립발레단 무용수, 홍인숙 제주도의회 의원이 참여하여 ‘제주발레의 발전방향 모갯과 새로운 콘텐츠개발’에 대한 내용으로 토론하였고, 정옥희 무용비평가의 발제3섹션에서는 김나영 뉴제주일보기자, 문 영 국민대 교수, 부혜숙 대한무용협회 제주시지부장, 이애리 제주관광대학교 교수가 참여하여 ‘글로벌 시대의 발레 예술교육’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라운드테이블에 자유롭게 참여한 제주도민과 애호가들 또한 함께 참여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와 함께 제주시민이 체감하는 예술과 발레에 대하여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다. 제주도내 문화예술단체 및 현황 제주도내에서는 현재 480여 개의 문화예술단체 약 15,000명의 예술가가 활동하고 있으며 전문예술가 단체인 제주도립예술단 5개 단체에 약 270명의 전문가가 활동하고 있는 등 문화예술 인프라는 양호한 편이다. 또한, 문화예술단체가 급증함에 따라 문화예술 인구수도 증가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제주에 정착하는 도외 이주민이 증가하고 도내 시민중에 아마츄어 예술단체가 급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단체는 서양음악 분야가 약 50%를 차지하고, 연극ㆍ뮤지컬 약 15%, 국악 및 크로스오버 약 15%, 콘서트 및 대중 약 10%, 무용발레 분야 약 10%의 순으로 활동 분야는 서양음악 분야의 비율이 가장 높고 이외의 단체는 10% 이내로 장르 간 불균형적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제주도내의 무용과 발레, 국악 등은 활동이 저조할 뿐 아니라 청소년과 무용교육과 이후의 대학의 전문교육을 할 수 있는 학과가 없는 상황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조차 육성되고 있지 못하여 매우 빈약한 상황이다. 다만, 2000년대 이후 제주아트센터가 개관하면서부터 꾸준하게 명작과 창작발레 등 다양한 무용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주아트센터에서의 명작 발레 공연은 공연장 전석 매진과 시민의 관심 확대되고 있다. 자료를 통해 본 결과 제주도내에서 무용공연 활동은 매우 부진하였으나 2018년 이후 명작발레 및 다양한 현대무용 등의 공연이 제주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제주아트센터 발레 공연의 경우 매번 객석 전석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고급예술인 발레에 대한 제주시민의 관심이 뜨겁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문예회관이나 행정에서는 시민의 요구나 변화하는 사회문화 현상을 제대로 이해못할 뿐 아니라 행정의 대응과 관련 활성화 정책은 없는 것이 제주의 현실이다. 발레무용분야 활성화 과제와 팔길이원칙 우리나라의 GDP가 3만불을 넘어서고 있고 제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관광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수준 높고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가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는 지역의 문화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여 추진하는 지역예술 행정의 문제이다. 예술 분야는 매우 세밀하고 전문적인 분야이기에 행정이 주도해서는 안된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에 의해 기획하고 집행 추진되어야 하는데 행정기관에서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 제주의 예술행정의 현실이다. 원론적으로 돌아가서보면, 제주의 무용과 발레 분야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초ㆍ중ㆍ고의 무용, 발레 활동을 정규 학과목으로 개설하여 장려하고, 전문 예술가 양성을 위한 예술 중ㆍ고교의 건립과 이후 전문가 양성을 위한 대학의 관련학과 개설이 필요하다. 또한, 전문적인 예술기관과 단체에서는 더욱 좋은 작품을 창작ㆍ제작하고, 지역문화가 스며 있는 창작예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예술ㆍ행정에서는 '팔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적용해야 한다. 행정의 역할은 문화예술을 최대로 지원하되 간섭은 최소화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 또한 팔길이 원칙의 문화정책을 강조하였다. 예술가를 사랑하고 예술을 흔들임 없이 지속적으로 지원, 후원 해야하는 것이야말로 행정의 책임이자 역할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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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이게 정말 죄가 될까요?[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이게 정말 죄가 될까요?' 이 말은 정말로 많은 것을 함축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이 무심코 한 행동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까요?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이 말은 최근 인터넷 발달로 인해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편리해졌지만, 반대로 그 파급력으로 인해 여러 가지 발생되는 문제점 중 하나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으로 인해 무분별한 비난과 비판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분이 지난가면서 저의 사무실을 들려서 “자기가 온라인상 댓글을 단 사유로 인해 경찰에 고발되어 지금 조사를 받으러 간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고충을 상담했는데, 필자가 이러한 사항은 변호사를 찾아가 면밀하게 상담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변 드렸으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경찰조사를 어떻게 받느냐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면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드릴 예정이고 이 사항이 검찰 송치까지 되시면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변호사를 선임하시라고 설명 드리면서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찾아주신 분 덕에 필자도 온라인상의 허위사실 유포 죄에서 다시 한 번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오늘은 허위 유포죄에 대해서 짧게나마 설명의 시간의 가져보겠습니다. ‘허위사실유포죄’라는 죄명은 형법상 존재하지 않으나, 어떠한 내용을 유포했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허위사실에 따라 명예훼손이 될 수 있고, 사기, 허위공시, 상표권침해, 선거법 위반 등 그 분야가 다양한데요. 통상적용은 형법 제370조 명예훼손 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 벌칙이 적용되어 처벌받는 것으로 온라인상 ‘사이버명예훼손죄’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이게 정말 죄가 될까요?’ 라는 말을 심층적으로 조명하여 볼 때 ‘사이버명예훼손죄’는 적시된 내용이 구체적인 사실이되어 허위사실이어야 하며, 적시된 내용이 불특정 혹은 다수인이 공공연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적시된 내용이 누구를 특정되어야만 성립하는 죄입니다. 하지만 적시된 내용이 누구를 특정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유추할 수 있는 사항으로도 성립이 가능하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례로 어느 축구단체를 운영하는 자가 축구부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게시한 글에 모집을 방해하기 위해 있던 사실에 추가하여 과장된 사실을 올려 축구부 모집을 방해하였다면, 이 사항은 ‘사이버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어 그 형벌을 매우 무거울 것으로 보입니다. 익명의 공간으로 운영되는 카페나 밴드라 할지라도 각 경찰관서에 ‘사이버수사대’에 고소장이 접수되면 해당 카페나 밴드가 운영되는 홈페이지를 통해 가입자의 정보를 취득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피하지 못하는 범죄행위라고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온라인 및 익명성이 보장된 곳이라도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비하발언을 하여 처벌을 받는 경우가 발생되지 않도록 상시 유념하시어 온라인 활동을 하시는 게 좋을 판단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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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영화 속 음악가 이야기① 모차르트-영화 ‘아마데우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영화 ‘아마데우스’는 대 작곡가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와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살리에리(A. Salieri 1750~1825)라는 두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중요한 특징은 첫째, 모차르트 자신이나 관객의 시각이 아니라 천재라고 불리던 모차르트와 동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살리에리의 입장에서 그의 고백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이고 둘째, 모차르트를 소재로 한 작품에 모차르트의 음악이 최상의 조화를 이루어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아카데미상 8개 부분을 차지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시나리오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한 극작가들 가운데 상업극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로 알려진 피터 쉐퍼(P. L. Shaffer 1926~2016)의 브로드웨이 연극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피터 쉐퍼는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평론가로서 지금까지도 극작가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음악계에 떠도는 얘기였던 모차르트의 독살설에 주목하여 대본을 썼다. 연극계에서 크게 흥행하여 1981년 토니상 최우수 극본상을 수상했다. 나중에는 이 극본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하여 연극보다 영화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에서도 1985년 제57회 미국 아카데미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 밀로스 포먼(M. Forman 1932~2018) 감독이 제작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1823년 72세가 된 늙은 살리에리가 50년 전인 1780년경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살리에리는 부유한 집안의 음악가로서 일찍 궁정악정이 되어 죽기 1년 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고 수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유명한 교육자였다. 이 시점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지났음에도 모차르트의 음악은 유럽 곳곳에 퍼져 점점 유명해졌지만 자신의 명성은 점점 쇠락하고 유명세를 누렸던 음악들은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히고 있던 때였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게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시나리오로 볼 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겪었을 회한과 비참한 심정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살리에리가 자살을 시도하고 쓰러진 첫 장면은 교향곡 25번 G단조 1악장의 빠르고 급박한 선율과 함께 오히려 음악에 화면을 맞춘 듯이 불안하고 긴박하게 시작한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17세였던 1773년에 만들어졌다. 세 번째 이탈리아 연주여행을 마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질풍노도 시기의 청년 모차르트가 그의 첫 걸작으로 이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간 볼 수 없었던 비극적 감정이 격정적인 당김음으로 포효한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슈테판 대성당(오스트리아 빈)의 십자가 소성당에서 마쳤으나 당시의 유명했던 천재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해가 실종되어 현재 비엔나 중앙묘지 특별 명예묘지 구역에 시신은 없고 묘석만 놓여있다. 영화에서는 모차르트의 시신이 관도 없이 담요에 대충 싸여 공동묘지의 구덩이에 다른 시신들과 함께 던져지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묘사된다. 이 때의 음악이 레퀴엠(Requiem K.626:3) ‘눈물의 날’이다. 그리고 영화 곳곳에 레퀴엠 전곡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배치된다. 레퀴엠은 라틴어 장례 미사 입당송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의 첫 낱말 ‘Requiem’(안식)에서 따온 말이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미완의 작품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미완으로 남겨진 부분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쥐스마이어(F. X. Suessmayer 1766~1833)가 완성했다. 쥐스마이어가 어느 부분을 어느 정도로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에서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는 인물이 살리에리로 처리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감독이 이를 모차르트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살리에리가 작곡을 의뢰한 것으로 바꾼 것은 영화의 극적 표현에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죽어가는 것으로 처리하여 영화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1784년, 이미 최고의 작곡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52세의 요제프 하이든(F. J. Haydn 1732~1809)이 28세의 모차르트를 만났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명성을 존중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위해 현악4중주 파티를 열었을 때, 하이든은 자신의 러시아 4중주곡을 듣고 감흥을 받은 모차르트가 변주한 작품을 보고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L. Mozart 1719~1787)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에게 맹세하고 말한다. 너의 아들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모차르트 역시 평소 하이든을 ‘파파 하이든’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모차르트는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어려서부터 작곡을 했기 때문에 성악과 기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 다채롭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하이든과 함께 빈 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하는 큰 공적을 쌓았다. 자기 생애 이전의 모든 고전파 양식을 체득하고 더 나아가 하이든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피터 쉐퍼의 저술은 살리에리의 눈과 경험으로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보편적 사회현상의 잣대로 재단하여 전개되는 구성으로 살리에리의 인간적 불가피성에 대한 관객의 동정과 흥행의 성공은 획득했으나 요절한 천재가 가졌을 예술적 판단과 도전, 경제적 결핍에 내던져진 젊은 예술가의 좌절과 사랑에 대한 고뇌, 기록이나 증언으로 널리 알려진 인간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할 때 가졌던 죽음에 대한 의미 있는 주장이나 예술적 표현은 말하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은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30년이 지난 후에도 비엔나에 만연해 있었다. 살리에리가 죽은 후 두 사람보다 반세기 후에 태어난 러시아의 푸시킨(A. Pushkin 1799~1837)이 1832년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독약을 마시고 ‘레퀴엠’을 연주하면서 죽어갔다고 하는 소문의 내용이 주제였다. 150여년 후 이 주제는 전혀 다른 스토리로 각색되었다. 음악가이자, 평론가로 모차르트와 쾨헬을 연구한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A. Einstein 1880~1952)의 주장에 의하면 레퀴엠의 의뢰인은 프란츠 발제크(F. V. Walsegg 1763~1827) 백작으로 죽은 아내의 1주년 추모식에 레퀴엠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려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거액을 주기로 하고 이 곡을 주문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요술피리’를 완성하기 위해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레퀴엠 중 ‘눈물의 날’ 8마디까지 곡을 쓰고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화는 사회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알릴 수 있는 중요한 매체다. 영화가 전달하는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의 확보는 중요한 문제다. 더구나 실존했던 인물이 작품화되는 과정에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보다 더 충실한 고증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감독이나 작가는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의 새로운 일화나 자료 확보는 전문가의 투입 등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해내야하는 작업이다. 각색과 허구의 구성에 대한 구체적 입장과 설득을 위한 진실성도 있어야 한다. 피터 쉐퍼는 이 영화를 '사실에 기초한 환상'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구체적 작업과 설명을 회피했다. 영화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필수 조건은 아니다. 현실과 전혀 다른 허구의 소재나 이야기도 영화화 될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영화다움이다. 아마데우스 역시 사실과 허구, 입증된 결과와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가 섞여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관객은 실제와는 어떻게 다르게 허구의 이야기가 영화화 되는지 판단하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실제 존재한 인물이 영화화 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해 내는 것은 관객의 권리이자 영화 애호가로서의 즐거움이다. 영화와 진정으로 친해지려면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로 만나야 한다. 프랑스 사상가 롤랑 바르트(R. Barthes 1915~1980)는 문학과 여러 사회현상에서 기호의 의미와 작용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을 영화에 적용할 때 어떤 영화와 어떤 인간의 관계가 형성된다. 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오직 시나리오와 감독의 의도와 주장만을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로서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의미와 주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바로 영화의 텍스트화(化)다. 영화에 녹아있는 진실을 찾아내고 자신의 개인적 비평을 넣어 영화를 되새김 한다면 이 되새김이 어떤 영화와 어떤 사람이 친구가 되는 일체감을 얻게 할 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