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
[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④ 정약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섬사람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흑산도와 우이도 현재 전라남도 행정구역상 흑산도(黑山島)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고 우이도(牛耳島)는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 속한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던 1800년경의 흑산도 지역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합쳐서 흑산도라 통칭 하였고, 흑산도를 대흑산, 우이도를 소흑산이라고 불렀다. 조선 영조 이후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없는 섬은 원칙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도록 공도(空島) 정책을 유지했으며 유배 죄인은 반드시 관리의 통제권 내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흑산도의 경우는 진(鎭)이 설치되어 별장(別將)이 파견되어 있는 소흑산도(우이도)가 유배지였다. 당시 조선은 유배자들에 대한 지원이나 공급 정책 자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비록 양반이라 하더라도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면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도를 찾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래서 여건이 열악하고 땅이 좁은 우이도 보다는 먹고 살기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흑산도로 깊이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우이도의 관리들도 유배자들이 대흑산도로 이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묵인했다. 손암 정약전도 소흑산에서 5년, 대흑산에서 8년, 다시 소흑산에서 3년을 살았다. 대흑산도 사리마을에는 손암이 살았던 집(복성재)과 서당(사촌서실)이 복원돼 있고 우이도 진리에도 구전으로 전해오는 집터와 서당터가 남아있다. 다음 글은 손암이 1816년에 죽은 뒤 2년 후에 다산이 기록한 ‘선중씨(先仲氏 돌아가신 둘째형님)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우리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의 성 북쪽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놓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다. 이때가 신유년 11월 하순이었다. 그렇게 떨어진지 16년 뒤인 병자년 6월6일에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에서 공께서는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셨다. 아! 슬프다. 공은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들어간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어부들과 친구를 하고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아 섬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흑산도로 흘러간 소문에, 내가 방면의 은혜를 입었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해배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흑산도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께서는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틈 타 첩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흑산도 사람들이 급히 뒤 쫒아와 공을 빼앗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갔다. 1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돌아왔다. 위 묘지명에는 손암이 술을 많이 마시고 섬사람들과 대단히 친하게 지냈다거나, 형님이 다산 자신을 위해 대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나오려 했다는 것, 대흑산도 섬주민들이 손암을 보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손암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4세의 실학자였던 그는 수학ㆍ천문학 등 서양의 놀라운 문물을 접하고 신학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결심으로 서학을 통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던 중에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타의에 의해 먼 바다 한가운데로 유배를 당했으니 현실에 대한 허무와 미래에 대한 절망 앞에서 참담했을 것이다. 이러한 형님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아우 다산의 마음이 깊이 스며있다. 손암이 아우를 그리워하고 위해 주는 심정도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이 해배되면 흑산도로 자신을 만나러 오리라는 소식을 듣고, 아우가 한 번도 큰 바다를 건너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형으로서는 본인이 흑산도로 유배 올 때 경험한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겪은 그 어려움을 아우가 견딜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우이도로 나가서 맞으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도 잘 표현 되어 있다. 실제로 1810년 이후부터 서울에서는 정약용을 석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의 줄기찬 상소도 있었다.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를 알고 있던 다산이 1814년 경 풀려나리라는 생각을 갖고 형을 만나러 가겠다는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은 반대파 노론의 방해로 석방되지 못하고 1816년에 손암이 죽고 난 뒤인 1818년에야 다산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섬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했고 귀양살이 하는 사람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유배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 담긴 관문서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흑산도 사리마을 주민들이 손암을 소흑산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집단행동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당시 유배자들의 대부분은 비록 유배는 왔으나 언젠가는 해배되어 본래의 벼슬과 그에 상응하는 권력도 다시 회복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신분들이기도 했으므로 양반으로서의 자존심과 거만한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고 그러한 행태가 당연시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손암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다른 유배자들과는 달리 그는 섬사람들과의 친밀함이 독특하다. 섬주민들의 태도는 그의 인간적인 품위와 유배 중에 주민들과 격의 없는 생활을 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천주교 신봉자로서 양반 상민을 구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들과 친하게 지냈고 자신의 학식을 공유하며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주민들이 정약전을 소흑산도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진기하고 인정이 넘치는 풍경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후 86년 후에 프랑스에 보고 된 정약전 이야기 1990년대 말에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에 의해 귀중한 보고서 자료가 발견되었다. 1902년 6월 6일자로 목포지역 주임신부였던 드예(Deshalyes Albert,1871~1910) 신부가 조선교구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흑산도에 사목방문을 다녀온 결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저는 정약전이 흑산도에 있는 박인수네 집에 귀양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인수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한국어 성가의 가사를 만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곧 주교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최초의 교우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이 보고서는 손암이 세상을 떠난 지 86년이 지난 시점에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천주교 주교에게 보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유배자 정약전이 어떤 인품을 가지고 유배지에서 살다가 갔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세상에 드러나곤 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신기하게 우리에게 생생한 과거를 보여준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예술사회학 : 관점과 역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고대시대의 예술은 신(神, God)을 영접하는 주술에 가까운 의식으로, 토템이즘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중세시대는 종교의 범위 안에서 노래와 그림, 의식 등을 통해 예술 활동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17~18세기에는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 일반대중으로까지 전파되어 예술 분야가 사회학과 정치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현대사회에서는 지역문화와 음악ㆍ미술ㆍ문학 등 순수예술의 중요성이 사회, 경제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와 지방정부는 다양한 문화현안과 정책을 사회현상과 접목시키고 있고 이러한 분야는 '예술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구되고 있다. 예술사회학 관점 헝가리의 아놀드 하우저, 프랑스 피에르 부르디외, 베라L.졸버그 등의 사회학자들은 예술을 사회적 과정과 조건의 결과로서 외재적 관점으로 접근한 반면, 미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순수예술에 중점을 두고 좁은 의미의 내재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특히,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사학자인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 개정판 2016)’, 예술의 사회학(1974) 등에서 예술을 사회의 환경변화 분야와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진정한 예술민주화로 나가려면 예술을 특정 분야로 제약하기보다 더욱 많은 대중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반면 부르디외는 '학자가 아니면 지휘자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고, 졸버그는 예술사회학(1999, 현택수 역)에서 '예술사회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We are the world : USA for Africa 지난 1984년 아프리카는 불안정한 정치체제와 유례없는 가뭄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고통과 빈곤을 겪고 있었다. 이즈음 음악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팝송이 발표되었는데, 1985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We are the world'이다. 이 앨범은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로 기획되면서 팝스타 마이클잭슨과 라이오넬리치가 함께 노래를 만들고 스티비원더, 케니로저스, 신디로퍼, 빌리조엘, 밥딜런, 레이찰스 등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흔들었던 대스타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자선 앨범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현실화시킨 사람이 살아있는 팝의 전설로 알려진 퀸시 존스(Quincy Jones, 1933~)로 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재즈 음악가이자 음악 프로듀서로 타임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음반은 발표 당시 빌보드 차트 R&B, 컨츄리, 팝 싱글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면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기록을 세웠다. 판매 수익금은 모두 에티오피아와 수단의 기근을 돕는 단체들에 기부되었다. 예술&기획자의 역할 고유한 지역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이 어느때 보다 회자되는 시기에, 예술사회학에 대한 논의는 문화예술 이외에도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문화경제학은 문화예술을 경제학적 측면으로 확장하고 있고, 예술사회학은 음악ㆍ미술ㆍ문학ㆍ영화 등의 예술 분야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으로 확장하고 있다. 200여년 전 세계의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낭만 음악시대를 열었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그랬듯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였던 35년 전의 미국 팝 음악 이야기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필요한 현실이다. 2020년 코로나19의 전파확산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고통받는 시기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고 시민으로, 공연기획자로서의 책무는 무엇인지 되돌아면서 또한 희망을 찾아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정치스피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정치(政治)는 정치인만의 특권인가? 나도 정치(政治)를 할 수 있을까? 말 뿐인 스피치가 아닌 말 덕분인, 말도 잘하는 스피치로 앞장서야 한다. 현재 우리 정치 스피치를 보라. 정치는 생물(生物)이어서 우선 말을 잘해야 한다. 말로 설득하고 말로 공감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보통 어떤 말로 아침을 열고, 온종일 무슨 말을 하며, 어떤 말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가? 또 당신 인생에서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 혹시 내가 선택한 정치인이라서 막연한 칭찬을 늘어놓지는 않는지... 혹시 내가 선택한 정치인이 아니라서 험담을 하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정치는 누가 해야 하는가? 아마도 정의롭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외칠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덧붙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정치인들을 만나 보면 일단 똑똑하다. 그러나 때때로 정치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정치와 부당한 권력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파괴력이 커서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다. 따라서 국민 눈높이에 앉아서 공감하고 강자에 맞서 싸워주는 모습은 감동을 선사하며 그 어떤 치료제 보다 월등히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 스피치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 째, ‘말의 절약’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말의 양이 많다. 물론 정치를 함에 있어 말의 힘은 가히 생명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일단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원한다. ‘Hearing’ 이 아닌 ‘Listening’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 스피치에서는 ‘나의 말’은 줄이고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작업이 우선이다. 둘 째, ‘말의 질문’이다. 질문을 귀찮아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질문은 국민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자 애정의 표현이다. 따라서 자문자답(自問自答) 하지 말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셋 째, 성의 있게 말하고 답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성의 있게 정성껏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필자가 스피치 교육을 20 여 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저는 왜 발음이 안 좋을까요?’ 그 답은 거울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입술이 한 자리에 있고 입 모양의 변화는 전혀 없다. 심지어 혀도 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확한 발음의 원인은 ‘대충대충’ 하는 ‘성의 부족’이다. 다시말해 ‘정성껏’ 발음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음 기관을 제대로 활용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력을 높일 수 있다. 일단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를 하다 보면 실현 가능한 꿈만 꾸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상이나 바람이 될 수 있다. 정치인도 인간이기에 막연한 꿈을 좇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만의 욕심이나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자기의 이익 보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당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이의 불행에는 관대하면서 자신의 행복에는 엄격한 잣대를 내세운다. 그 행복의 기준에 동참하는 정치를 넣어보자. 그리고 그 엄격한 잣대로 행복지수를 높여보자.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국민 특히, 유권자들은 그들을 평가하기 바쁘다.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판하기에 앞서 ‘나도 정치를 한다.’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또한 스스로 정치를 한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정치인이나 정당에 요구하고 질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창구를 다양하게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에 딱 좋은 지금 시대! 미디어 플랫폼이 다양하다. 활용해 보자. 말의 무게는 특성 상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울 수도 있고, 가장 무거울 수도 있다. 경(輕), 중(重)을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인품인 것이다. 의견 대립으로 싸울 수 있지만 화해는 서두르자. 현재의 정치가 왜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 오는 지 생각해 보면 말만 앞세우는 즉, 약속 이행이 없는 정치인이 많기 때문이다. 정치 스피치는 언행일치(言行一致)가 필수 요건이다. 정치인 스스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함을 잊지 말자. 국민이 평안한 정치 스피치를 바라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캄보디아 국민 영웅-캄보디아 댁 당구 여신 ‘스롱 피아비’[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지난 칼럼에서 캄보디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약 국민 영웅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던 ‘손 스브메이’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그 글을 마무리하고 난 이후에 가만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캄보디아 여성 ‘스롱 피아비 (Sruong Pheavy)’가 한국 여자 당구 1위에 올라 캄보디아에서 당구 여왕 또는 당구 여제의 이름으로 불리며 또 다른 국민 영웅으로 대접 받고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당구 애호가라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많은 독자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캄보디아 현지에서도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 인’이라는 기사로 각종 언론 매체에 소개되어 있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축하와 격려를 아무리 많이 해도 기분 좋은 일이라 생각하여 그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스롱 피아비’는 1990년생으로 올해 만 31세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북쪽으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깜퐁 참’ 주에서 아버지와 함께 감자 농사를 짓던 그녀가 2010년 당시 나이 스무 살에 지금의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2011년 어느 날 당구장에 가는 남편을 따라간 ‘스롱 피아비’는 남편과 친구들의 당구 게임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혼자 즐기는 것이 미안했던 남편이 아내에게 당구 한 번 쳐보라는 말에 난생 처음 당구대를 잡아 본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게 되었고 오늘날 당구 여제가 된 시작이었다. 그때 ‘스롱 피아비’는 간단한 남편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당구대를 잡았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부적인 당구 실력을 드러내어 주변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당구 실력에 놀란 남편은 내친 김에 당구 선수로 만들고자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하루 열 두 시간이 넘게 연습을 하여 마침내 2014년 전국 아마추어 당구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이때부터 ‘스롱 피아비’라는 이름이 당구 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16년에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그 다음해인 2017년 6월에 국내 랭킹 1위에 오르는 놀라운 일을 벌이게 된다. 이후 ‘스롱 피아비’는 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은 물론이고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 우승하는 등 세계 랭킹 2위까지 오르게 되면서 한국 당구계는 물론 전 세계 당구인들 사이에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지난 달 경주에서 열린 LPBA(여자프로당구대회) 월드 챔피언 쉽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롱 피아비’는 그동안 우승 상금은 물론이고 각종 후원금과 기업체 스폰서까지 말 그대로 돈과 명예를 다 가지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의사의 꿈도 접었던 그녀가 이제는 당당하게 고국 캄보디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며 특별히 캄보디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나의 제자들도 그녀의 열성 팬임은 물론이며 어느 땐 그녀의 시합 장면을 수업 시간에 감상하기도 하였다. 당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녀와 관계된 유명한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께서 캄보디아를 국빈 방문하셨을 때 (2019년 3월 14-16일) 한국 측 수행 인사에 뜻밖에도 ‘스롱 피아비’가 초대되어 캄보디아 정부와 교민 사회가 깜짝 놀랐던 일이 있었다. 그만큼 ‘스롱 피아비’는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인으로 알려졌고 이 일로 인해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캄보디아 정부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캄보디아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과 캄보디아의 우의는 이전보다 훨씬 돈독해졌으며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 간 한국의 대통령에게 중국 일변도의 친중 성향인 캄보디아 정부는 국왕을 비롯하여 훈센 수상 등 국가 지도자들이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로 인해서 캄보디아 젊은이들은 한국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으며 한국은 그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해 기회를 주는 나라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이래저래 한ㆍ캄 커플의 힘이 양국 우호는 물론 대한민국 국익 신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고 머리 또한 영리하다. 그래서 세계 6대 불가사의라고 일컫는 ‘앙코르 왓’을 만들었고 거기에 새겨진 부조는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앙코르 왓’건축에 과학적인 건축 기법은 물론이고 천문학까지 동원하였으니 그 시기에 이미 문명 발달 수준이 상당하였던 민족이다. 이렇듯 그들의 손끝과 머리에서 만들어진 ‘앙코르 왓’은 신비롭고 웅장하여 말 그대로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그런 고대 크메르인들의 우수성을 ‘스롱 피아비’가 당구대에서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롱 피아비’는 얼마 전 코비드 19로 고통 받고 있는 고국 캄보디아를 위해 한국산 마스크를 기부하는 선행을 하였다. 이 일로 캄보디아에 한국산 K-마스크의 우수성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한국 마스크 품질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다. 엄청나게 밀려들어온 중국산 마스크 보다 인기가 높아 나의 학생들은 모두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준 KF-94 마스크를 자랑스럽게 쓰고 다닌다. 심지어는 나의 이웃들도 한국 마스크를 얻기 위해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한다. (KF-94 마스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 칼럼에서 다시 전해드리고자 한다).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인 ‘스롱 피아비’, 한국에서 성공한 삶을 만든 그녀에게 큰 찬사를 보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합법과 불법 녹취의 정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필자가 지난번 칼럼에서 ‘알아야 산다’라는 말을 어필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음장치의 발달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 중 제3자와의 대화를 녹음하여 약점을 잡거나,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잘 활용한다면 생활에 윤택한 부분을 더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법에 접촉되어 실형을 사는 경우도 많아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오늘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필자의 지인 또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통화 중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사과를 하였는데, 상대방이 이를 빌미로 한 증거 제시를 하여 경제 및 심리적 손해가 발생되는 경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전화통화 자체만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항상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녹취하여 결정적 증거, 인정 증거로 제시하여 오히려 통신비밀 보호법을 위배하여 실형 또는 자격정지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오늘은 합법적인 녹취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누군든지 법의 지시없이 우편을 검열하거나 전기통신 장치의 감청, 공개되지 않는 타인의 대화나 상대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상대방의 동의없이 하는 녹취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의제할 수 있겠지만, 실제 현행법 적용에서 녹취 당사자가 직접대화에 참여하면서 녹취하거나 녹음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다시 한 번 설명 드리자면 '합법적인 녹취 및 녹음 방법은 대화 당사자인 내가 녹음하면 합법', '대화 참여자가 아닌 남이 녹음하면 불법'이 됩니다. 이를 잘 알고 녹취 및 녹음을 하셔야 되며, 본인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했다 하더라도 녹취 및 녹음은 합법이지만 이를 유포하거나 유출하는 것은 또한 통신비밀 보호법에 어긋나는 행위로써 함부로 타인 및 제3자에게 들려주거나 유출하는 행위는 가급적 삼가셔야 됩니다. 아무리 합법적인 녹취 및 녹음이라 할지라도 사용방법에 따라 쟁점을 만들 소지가 충분하오니 이를 간과 하지 마시고 주변에 전문가를 찾아 상담을 통해 사용방법을 선택하시는게 개인의 신상에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설명드린 내용 중 불법 녹취 및 녹음된 자료라도 소송사건의 경우는 가끔 증거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죄에 해당되어 소송사건외에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죄는 초범이라 할지라도 꼼짝없이 징역형을 살 수 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공증을 받은 녹취록이나 녹음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송사건에서 무조건 증거로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며, 그 내용 안에는 사건에 관련된 견련성, 객관성, 적격성이 담겨 있어야만 활용이 가능하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의 대화속에서 상대방이 인정을 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표현 조차 특정할 수 없는 상태의 녹음 파일을 가지고 오셔서 그에 대한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시는 의뢰인 분들도 많아 진정 또는 청원을 써드리는 저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하는 경도 많이 있습니다. 더불어 수년간 배우자의 유책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지만, 취득원인이 불법인 상태로 가져오셔서 증거로 활용할 수 없거나 오히려 상대방에게 역 고소를 당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를 겪으실 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녹취 및 녹음을 활용하시기 전에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 면밀한 상담을 하시라고 추전드리고 싶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 동안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좀 더 파악이 된다면 다음에 이러한 행위를 할 경우 도움을 줄 수 도 있다는 판단에 작성된 글이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③ 조선 최초 지동설(태양중심설) 주장[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태양중심설) 지동설(地動說)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천체 중 하나라는 이론이다.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로서 천체 관측과 궤도 계산을 연구하는 천문가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태양중심설) 주장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로서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중세의 우주관인 천동설(지구중심설)을 뒤엎는 혁명적 결과를 이루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지동설의 파급력은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 입장인 태양중심설로 발상의 대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인류는 파격적인 인식의 변환이나 획기적인 변혁이 있을 때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컫는다. 18세기 조선의 천문학에 대한 관점 조선시대의 천문에 대한 관심은 세종이 장영실을 천민의 신분을 면하게 하여 중국의 ‘천문기기’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천문관측기기’들을 제작하게 한 것이라든지, 영조 때부터 혜성의 출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연구하게 한 일 등 수많은 과학에 관련된 조선의 노력과 성과가 있었지만 서양의 과학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동ㆍ서양의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몰두한 과학과 관련된 사실들도 독자적인 학문의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 현실을 접하고 이것을 수용하느냐 마느냐 정도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과학적 성과 보다는 실학자로서 열린 눈으로 수용해서 입증하고 발전시키려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하는 정도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천문은 제쳐놓고 지구에 대한 것만 보더라도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체가 다른 천제의 둘레를 주기적으로 돈다고 하는 지구공전설(지동설-태양중심설)에는 생각이 이르지 못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지구 구설(球說)이나, 지구가 그 둘레에서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자전설에 관심을 갖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 둘째 형님께 글월 올립니다 혜성의 이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형님께서 보내주신 글에서는 이것을 지구가 도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혜성은 지난 7, 8월에는 북두칠성 자루 쪽의 두 번째 별에 밀접하게 붙어 있었는데. 8월 그믐쯤에는 점점 높이 떠서 점점 서쪽으로 갔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별이 도는 것이지 지구가 돌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령 지구가 운행한다 하더라도 별 역시 옮겨가고 있으니, 이것을 보면 별은 한 곳에 붙어 있고, 지구만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붙박이면 붙박이고 떨어지면 떨어질 일이지 어떻게 돌 수가 있고 옮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 ‘1812년 경 유배 중에 다산이 형 손암에게 보낸 편지’ 정혜렴 역주, 2002 * 다산은 실학자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연구와 학문적 성과를 남긴 석학이지만, 당시 지구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놀랄 정도로 근시안적이었다. 형 손암이 지구가 스스로 돌며 공전한다고 하는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하는 아우 다산은 지구가 둥글고 스스로 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태양중심설은 결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동생 다산에게 부친다 요즘 혜성이 서북쪽으로 가로 뻗쳤으니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띠(火帶)의 변화함을 분명히 알고 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네. 혜성이 처음에는 서쪽에 있다가 점점 동쪽으로 향했는데 지금은 북두성 동쪽 5, 6도쯤에 있으니 이는 지구가 운행하는 분명한 증거이네. 그렇지 않다면 불띠를 두른 혜성이 어째서 돌고 있겠는가? 지구가 운행하는 때에 불띠 꼬리가 또한 조금씩 동쪽으로 도니, 이로써 지구로부터 별자리에 이르기 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 수 있네. - ‘1812년 경 유배 중에 손암이 동생 다산에게 보낸 편지’ 정혜렴 역주, 2002 * 아우의 답장에 대해 다시 손암이 지구의 공전에 대해 설명하며 쓴 편지 내용이다. 이렇듯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조선의 선각자들이었던 실학자들도 새로운 서학의 과학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을 그대로 수용해서 인정하고 연구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두 형제는 서양에서 발전된 천문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실학자로서 날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록하고, 편지로 서로 물어보면서 천문을 연구했다. 조선 최초로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사람은 최한기가 아니라 손암 정약전 * 요컨대 그는(손암 정약전) 지구가 둥글고 자전할 뿐만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확신하고 혜성의 이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증명은 그 과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최한기 보다 앞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성호학파의 양명학과 서학』 서종태, 1995 * 손암과 다산 두 형제가 유배 중에 쓴 편지들에 의하면 손암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비롯한 천체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혜성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공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보고, 혜성의 이동을 자세히 관찰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성호 이익이나 다산도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이 지구의 구설은 믿었지만, 지구가 스스로 돈다고 하는 자전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고, 또 중국보다도 먼저 지구가 스스로 자전해서 낮과 밤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던 효종 때의 김석문이나 영조 때의 홍대용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중에서 지구의 자전은 수용했지만,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하는 지동설은 믿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중에 최한기(崔漢綺,1803~1879)라는 학자가 있다. 최한기는 진사시에 급제한 일이 있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독서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지은 책이 1천여 권이 넘는다고 전해지고 있고, 현재 남아있는 저술도 20여 종에 120권이 넘는다. 그는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했고,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와 함께 지도제작에 참여한 기록도 남아있다. 손암과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최한기가 최초로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한기는 1803년에 태어났고, 두 형제의 천문에 대한 편지는 1805년에서 1812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최한기 보다 손암 정약전이 더 먼저 조선 최초로 지동설을 확신하고 그 입증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문화예술공간 및 문화정책의 핵심과제 : 예술경영마케팅[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문화예술경영: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이동 문화예술기관과 문화예술활동의 현장에서 예술경영마케팅을 주요 과제로 삼은 것은 유럽 중심의 순수예술활동이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는 1900년대 초 무렵이다. 그 이전에는 전통적인 유럽의 순수예술이 전 세계적으로 주류를 이루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심의 고급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이 뉴욕 중심의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공연예술과 서부 헐리우드 중심의 영화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상업적으로 대폭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파트너쉽을 통한 기업후원 중심의 예술경영 마케팅 분야가 중심에 있었다. 이후 예술이 사회학의 한 분야로 다뤄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문화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만들어지고, 예술은 사회학, 경영학, 경제학의 측면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예술경영학 분야가 대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 중후반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 등의 복합문화 공간과, 한예종, 단국대, 추계예술대, 성균관대, 경희대, 중앙대 등의 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2000년에 들어서며 예술경영학은 전국의 대학과 문화예술 공간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문화예술의 핵심과제가 기존의 전문예술가의 육성에서 문화예술 기획과 마케팅 중심의 예술경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니타 M. 콜브 '문화예술기관의 마케팅'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1년 자료에 의하면 2020년 공연관람객이 ‘전년 대비 90% 이상 감소’했다는 응답이 46.8%였으며 ‘50% 이상 감소’한 비율이 86.7%로 나타났다. 또한, 매출액 감소는 ‘전년 대비 70~100% 감소’가 38.5%, ‘ 50~70% 미만 감소’가 23%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 통계는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즉시 나타나면서 코로나19로 인해 휴업이나 폐업을 한 경험률이 45.8%로 나타났고, 전국적으로도 음향, 조명, 악기, 장비 등의 관련 업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다. 보니타 M. 콜브(Bonita M. Kolb) 박사는 펜실베이니아 주 라이커밍 대학과 뉴욕의 프렛 연구소,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문화예술경영학과 마케팅 관련 연구를 하였다. 특히, 브루클린 미술관, 런던의 오케스트라, 위그모어홀 등 유명 문화예술 기관과 함께 문화예술마케팅 연구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문화예술 및 예술경영의 스테디셀러인 '문화예술기관의 마케팅'을 집필하였다. 여기에는 기업의 후원을 받는 대신 세련된 취향을 가진 고소득 고객에게 기업 홍보 기회를 제공한 로열셰익스피어극단, 고객을 성별, 연령별, 구매 빈도별로 세분화하여 접근함으로써 예매 갱신율을 높인 포트워스오페라단, 목표 고객인 고학력 여성들이 많은 신용조합과 단체할인 계약을 맺은 올드글로브극단 등의 사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문화예술기관의 다양한 에술경영마케팅 또한, 세계의 클래식 팬들에게 잘 알려진 저렴한 입장료와 자유로운 분위기로 대중적 클래식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BBC 프롬나드콘서트, 온라인 가상 갤러리에 이용자 스스로 작품을 제작해서 올릴 수 있도록 한 미술관의 사례, 킹 목사의 생일에 음악회를 개최함으로써 흑인들을 클래식 음악의 소비자로 만든 사례 등 다양한 문화예술마케팅과 관객개발전략 등은 지금까지도 좋은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코로나 블루로 위기에 처한 공연장, 미술관 등의 문화예술 공간과 예술단체 및 문화관광 축제에 기업후원을 통한 파트너쉽, 시민중심의 멤버쉽과 스폰서쉽, 틈새시장을 이용한 관객개발전략 등 문화예술기관과 문화예술 활동의 현장에서 다양한 예술경영마케팅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버ㆍ견ㆍ참 스피치 (나를 위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당신은 무엇에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이루고자 하는 열망과 갖고자 하는 욕심이 충족되었을 때 ‘역시’를 외치며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것이다. 반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과 좌절 속에서 한탄을 하곤 한다. 자학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 째,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自足)’이 필요하다. ‘이 정도면 됐지 뭐.’ 너무 간단하고 뻔한 답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만 있으면 고인 물 즉, 정체된 삶이 될 수 있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만 만족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둘 째, 자신의 능력을 끝까지 의심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강한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음의 힘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까지도 재고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열정과 의지만 있으면 그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상상을 한다. 그러나 결국 상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천적인 연습 과정으로 목표를 성취하거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고난 ‘끼’를 발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다소 무겁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끼’없는 실력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 분야가 그러하다. 타고난 소질과 후천적인 노력이 더해지면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술가..그들이 그러하다. 스피치도 마찬가지이다. 타고난 말발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이들이 있다. 감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주 유감스럽게도 ‘말’은 타고난 ‘끼’ 보다는 후천적인 훈련의 대가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전 결론이다. 물론 갖고 태어난 언어적인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언어는 출력하지 않으면 사장되고 만다. 오히려 그 재능은 퇴화한다. 언어가 갖는 특성이다. 우리는 쉽게 이루지 못하는 현실에 갈증을 느낀다. 원인은 무엇일까? 자신의 지금 위치를 확인하고 계발해 나가려는 정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주위를 살펴보면 해답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힘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렵게만 생각하고 멀리서만 찾으려 하진 않는지..... 가장 가까이는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한다. 언어적인 자신의 ‘끼’는 있는가? 언어 구사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자신의 ‘끼’를 찾고, 찾아보니 ‘끼’가 없다면 후천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플랜 B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인체는 신비롭다. 자가 치료도 가능하다. 이처럼 내가 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무한한 가능성이 담긴 내 안의 보물 상자를 열어보게 된다. 언제나 쉽게 누릴 수 있는 공기나 물처럼 그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갖고 있는 재능도 발견할 수 없고, 플랜 B도 세울 수 없게 된다. 언어적인 나의 능력은 그렇게 꾸준히 구축하는 것이다. 몰라서 꺼내지 못하는 것과 알아도 꺼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맹신도 문제일 수 있지만 알고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방치하는 것이다. 내면의 가능성을 끄집어 내어 외적으로 발산시키자. 나의 새로운 계발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온 것이다. 핑계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꾀만 부리는 여우와 다를 바 없다. 다음과 같다.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어. 딸 필요가 없어!’ 그럴싸한 핑계가 유성처럼 쏟아진다. ‘이 나이에 뭘’, ‘내가 뭐라고’, ‘내 주제에’... 무엇을 시작하는 데에 때는 없는 법이고, 시간도 만들기에 따라서 하루를 25시간으로 늘릴 수도 있다. 자신의 짐작과 어설픈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맹신 습관도 버리고, 무엇이든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꼼꼼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경험을 떠올려 재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험을 완벽한 무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달에 가보지도 않고 방아 찧는 토끼를 보았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자신의 추측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실패든 성공이든 효용가치를 높여야 한다. 오해와 편견에서 탈출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 즉,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 다소 쓰긴 하지만 실패처럼 좋은 약도 없다. 실패의 이유를 찾아 분석한 뒤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재도전해야 한다.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것이다. 나의 꿈이 현실이 되는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버티고, 견디고, 참아야’ 한다. ‘버ㆍ견ㆍ참’을 기억하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국가의 예술 정책[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코로나에 이어 또 다른 된서리를 맞게 된 2021년 축제들 주로 연극분야의 축제들이 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올해 지원사업 공모에서 오래도록 꾸준하게 지원을 받아 성장해온 지속성과 정통성을 만들어 가고 있던 축제들이 올해 지원사업 공모에서 대거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각 단체들과 축제 조직위는 성명을 내고 강하게 반발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래 사진은 지난 6월 21일 ‘예술창작정책살리기비상회의’가 발표한 공동성명서이다. 이 문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기획재정부의 방침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예술계의 반응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임명에 대한 부당성까지 언급되는 수준이다. 그러면 왜 기획재정부에서 축제에 대한 선별을 이야기 하게 되었는가가 더 궁금해진다. 각 단체들과 축제들이 지원사업에서 대거 탈락한 이유 첫 번째는 지원 예산의 삭감이다. 지속성과 정통성을 선심성, 소비성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여기에 선심성과 소비성이 기준이 되는 이유는 집객과 행사의 수혜를 근거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집객 수준이 적고 수혜를 받는 대상은 각 단체들과 축제 관련자들로 한정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극이라는 장르의 몰이해에서 시작된 시각이 실제로 척박하고 열악한 현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문제가 그대로 반영이 된 결과이다. 두 번째 문제는 3년 이상 된 축제의 지원이 불필요하다는 시각이다. 공연예술축제, 특히 연극축제의 경우 지속성을 갖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시각은 공연 예술이 갖는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축제의 지속성은 그 예술 장르의 1년 단위 예술적 성과를 한자리에서 확인 할 수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지속성으로 만들어진 정통성은 안정적인 예술가의 저변확대와 배출 및 새로운 창작의 중요한 출구가 되고 작품들이 서로 비교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지속적으로 향상 시킬 수 있는 축제만이 갖는 장점을 무시한 결과이다. 여기에 추가로 기획재정부의 방침으로 앞으로 매년 10%의 예산 삭감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상황이다. 예술이라는 분야에 성과주의를 대입시켜 판매의 결과인 매출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거의 모든 예술은 창작보다 유행, 판매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유행이 지속되면 예술이 갖고 있어야 하는 다양성과 독창성은 점점 사라지며 획일적인 사회가 되고 만다. 정부의 기관이 지원사업을 실행하면서 사업 성과의 잣대를 집객이나 효과의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자금을 집행해야 하는 기획재정부의 시각에서는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20년 30년 동안 전 예술 분야 중 가장 척박하다는 환경에서 축제를 지속 시켜오던 사람들에게는 코로나보다 더 가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크게 느껴진다. 기획재정부의 시각이 반영되었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현재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정부에서는 다시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획재정부의 주요 업무라는 정책 기획과 부처간의 조율이 힘없고 전문성 없다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게는 갑의 명령으로 바뀌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전문가 컬럼] 캄보디아에서 태권도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전문가 컬럼=힌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내세울 것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다른 나라에서 한국하면 기억해 주는 것이 한국전쟁, 태권도, 김치 이 정도였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이야 우리의 슬픈 역사 중 하나이고 그 폐허를 딛고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굳이 감출일도 아니고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며 그런 어려운 역사를 이겨냈음은 당연히 자랑스러워할 일 중 으뜸일 것이다. 김치는 얼마 전 중국이 한복과 더불어 자기들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넋 나간 소리를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나보다. 태권도 역시 전 세계 어디서든 모르는 이가 없고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로 우리의 메달밭이 되었으며 태권도가 보급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가 오래 유지되었다. 세계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소중하게 여기며 간직했던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한 정의, 예절, 사회성 등의 여러 태권도 정신에 매료되었고 단순한 체력 단련으로 건강을 다지기 위함을 벗어나 앞에서 언급한 태권도 정신을 배우고자 오늘도 수많은 세계인들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태권도는 아주 특별한 대접과 인식을 갖고 있는 스포츠이며 국가 역사에 한 획을 장식한 특별한 사건이 있는 스포츠이다. 캄보디아는 한 때 우리 보다 잘 사는 나라였고 한국전쟁 때는 우리에게 식량을 원조해 줄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위정자들의 부정부패와 내전, 특히 ‘킬링필드’로 불리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내전을 겪으며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지금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잘 살아보겠다고 국가 부흥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고 있지만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통쾌하고 기분 좋은 국가적 경사스러운 일들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때 벌어졌으니 그것은 캄보디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태권도에서 획득하게 된다. 온 나라가 열광하였고 국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며 그 때의 흥분은 지금도 태권도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일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꿈과 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우리에게는 올림픽도 아니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인데 뭘 그렇게 까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캄보디아는 그 때까지만 해도 올림픽은 고사하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이라는 목표는 말 그대로 넘사벽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냥 포기로 삶을 살아 온 캄보디아인들에게 아시안 게임 금메달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질 정도의 사건이었다. 주인공은 당시 12학년(고교 3학년)생이었던 여학생 ‘손 시브메이(Sorn Seavmey)’ 선수였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 어느 곳이던 실시간 방송이 보편화 되어있지만 그 때만 해도 캄보디아는 방송 인프라가 부족하여 많은 국민들은 캄보디아 대중 매체나 다름없는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등을 활용하여 전국 각지로 소식을 전했으며 전국은 흥분과 열광에 빠졌다. 금메달 획득 소식이 전해지고 순식간에 전국 주요 도시에는 금메달 획득을 축하는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고 우리 한국인들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캄보디아 거주 한인 단체, 나아가서 많은 교민들이 개인적으로 내건 축하 현수막까지 수도 프놈펜 곳곳에 걸리게 될 정도로 현지인들과 축하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한국에서 캄보디아 도착 항공기는 늦은 시간에 도착한다) 정부 고위 관료들은 공항에서 직접 ‘손 시브메이’ 선수를 맞이했으며 프놈펜 국제공항은 수많은 환영 인파와 언론사들의 취재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또한, 정부는 프놈펜 국제공항에서부터 프놈펜 시내까지 선수와 코치진들에게 카퍼레이들 시켜 주었고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환영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훈센’ 캄보디아 수상은 관저에서 잠을 마다 않고 ‘손 시브메이’선수를 기다렸다가 영접하였으며 선수와 코치진의 노고를 크게 치하했다. 이 때 캄보디아 정부는 ‘손 시브메이’선수에게 금메달 공식 포상금 2만 달러와 훈센 총리의 특별 포상금 1만 달라를 수여하였으며 대학교 특별 입학 자격과 연간 1500달러의 장학금까지 지급하게 된다. 이외에도 훈센 수상이 아파트를 하사하였으며 여러 가지 선물도 많이 받게 되었다. 이것만이 아니라 이 후에 ‘손 시브메이’ 선수는 빼어난 미모 덕분에 온갖 광고 모델을 요청 받아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되는 신데델라가 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이 나라에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1976년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첫 금메달을 땄을 때 전국이 열광에 빠졌던 때를 기억하면 이 당시 캄보디아인들의 기쁨을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캄보디아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1996년부터 캄보디아 대표팀을 지도하는 최용석 감독은 이때부터 국가 영웅 대접을 받게 되고 태권도의 인기는 캄보디아 전국을 뒤 흔들며 그 인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느 한 나라가 이렇듯 전 국민이 열광하고 꿈과 희망을 가지게 되는 사건에 우리의 것, 자랑스러운 태권도가 있으니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태권도는 언제나 그렇고 어디에서도 그렇고 누구에게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소중한 우리의 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